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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가야만 하는 길] "1989년 10월 17일 ‘동베를린의 봄’" (데일리안, 202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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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8회 작성일 25-10-26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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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가야만 하는 길] "1989년 10월 17일 ‘동베를린의 봄’" (데일리안, 2025.10.17)

https://www.dailian.co.kr/news/view/1560086/

<사진> 호네커(왼쪽 아래)가 쫓겨나고 크렌츠(왼쪽 위)가 당 서기장이 되었다고 보도한 1989년 10월 18일자 서독 일간지 ‘Der Tagesspiegel’ 특별판. ⓒ Der Tagesspiegel


“에리히, 더 이상은 안 돼, 너는 떠나야만 해.”

18년 전 1971년 발터 울브리히트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때 그가 했던 같은 말을 1989년 10월 17일 동독 공산당 서기장·국가수반·국방위원장 에리히 호네커 자신이 들어야 했다.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7만명의 시위에 속수무책이었던 공산당 지도부는 10월 16일 라이프치히에 무려 12만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자 경악했다. 같은 시각 드레스덴과 마그데부르크에도 1만명이 운집해 개혁·개방과 자유를 외치고 있다는 급보도 날라왔다. 전날 할레에서는 2만명이 함성을 질렀다.

물론 동독 공산당은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에 동베를린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한 것처럼 무력 진압을 준비했다. 동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만 66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비밀경찰 슈타지(Stasi)는 “몸에 총을 겨누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병원에 병상과 혈액을 더 많이 준비하도록 조치도 해두었다.

그러나 이날 시위도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6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학살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고, 많은 사람이 시위에 대한 ‘중국식 해결책’을 우려했으나, 동독 공산당은 더 큰 고민에 빠졌다.

고르바초프가 진압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폭력 사용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당 서기장 호네커와 고르바초프의 관계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동독 공산당 중앙기관지 ‘Neues Deutschland(새로운 독일)’은 다음 날 아침 “토론이 전국적으로 진행 중이다, 주제는 동독 사회주의의 계속 발전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서방의 개입이나 지원 없이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며, 해결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행간에 정권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 암시되었다. 바로 이날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국가 및 당 지도자 호네커를 해임했다.

사실 호네커를 몰아내기 위한 공산당 정치국원들의 공모·공작은 한 달 전 이미 시작되었다. 반란의 구심점은 호네커의 황태자이자 권력 2인자 에곤 크렌츠여야 했다.

크렌츠가 망설이자 9월 초 국가계획위원장이자 정치국원 게르하르트 쉬러가 설득했다. 호네커의 퇴진 외에 대안이 없다, 자신이 정치 국회에서 그것을 제안하고, 자신 역시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다며 결단을 촉구했다. 크렌츠는 호네커의 운명이 아니라 동독의 운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결심했다.

정치국원이자 동베를린 공산당 제1서기 귄터 샤보프스키, 정치국원이자 노조연합위원장 해리 티쉬도 동참했다. 호네커는 물론이고 경제담당 귄터 밑탁, 선전·선동담당 요아힘 헤르만도 함께 잘라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친위쿠데타 디데이를 10월 17일 화요일 정치국 회의로 잡았다.

크렌츠는 1970년 서독 빌리 브란트 수상과 두 번이나 정상회담을 했고 당시 다시 총리를 맡고 있던 빌리 슈토프도 포섭했다. 호네커의 오랜 동지이자 전우나 다름없었던 그가 배신을 결심한 것이다.

결정적 성과는 슈타지 수장 에리히 밀케를 끌어들인 것이다. 밀케는 노쇠하고 독단적인 호네커와는 더 이상 중요한 집단적 토의와 결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물론 그는 동독 공산당 정권의 안정을 염두에 두었지, 불과 몇 달 후 동독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정치국 회의에서 다수결 승리를 확신하자 이들은 주동독 소련 대사에도 거사 계획을 알렸다. 고르바초프의 명확한 입장을 직접 확인하고자 해리 티쉬는 10월 16일 급거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고르바초프가 “거사의 성공을 빈다”고 힘을 실어주었고, 호네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77세 호네커는 권력 장악을 확신했다. 건국 40주년 행사에서 받았던 인민군과 주민의 열렬한 환호를 음미하면서, 10월 17일 정치국 회의실 문을 열었다.

모두와 악수로 인사를 나눈 후, 그는 개회를 선언하고 준비된 의제에 관한 토의를 시작하고자 했다. 슈토프가 총대를 멨다. 그는 당 서기장의 해임 안건을 먼저 논의하자며 의제 변경을 요청했다.

호네커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고 샤보프스키가 회고했다. 밀케가 비밀리에 슈타지 요원을 정치국 대기실에 배치한 상황이었다. 호네커와 그 추종자들이 반발할 경우 즉각 체포할 셈이었다.

호네커는 충격적인 쿠데타의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가장하며 서기장 해임안에 관한 토론을 허용했다. 설마 하는 희망은 즉시 사라졌다.

정치국원, 동독 최고 실세들이 순식간에 그를 버렸다.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밀케가 직접 나서 칼날을 휘둘렀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국민은 답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그냥 있는 동안 상황이 바뀌었다, 호네커는 설명을 찾지 말고 슈토프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많은 일을 겪었다, 그렇다고 탱크 포를 발사할 수는 없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끝까지 자신의 실패,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호네커는 몸을 일으키며 최후 진술에 나섰다. 여러분의 제안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위기 속에서도 당은 ‘단결’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의 교체로 과연 동독 내부 문제가 진정될 것인가, 사람을 바꾸는 것은 “협박이 통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줄 뿐이고 상대는 이를 이용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자신은 이 사실을 패배자로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가장 충직한 동료로서 말한다고 끝을 맺었다.

자신의 퇴진 안건에 호네커 자신도 찬성한다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밑탁과 헤르만도 해임되었다. 정치국은 크렌츠를 공산당 서기장으로 추대했고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공식적인 권력 교체는 다음 날 이루어졌다. 호네커가 18일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에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의 사임을 요청해 중앙위가 이를 수락했고, 크렌츠가 후임자로 결정되었다고 공표되었다.

호네커 18년 권좌가 무너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그의 예언만큼은 적중했다. 동독 주민은 더 많은 것을 원했고, 그의 퇴장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크렌츠는 이날 취임사에서 동독 정부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Wende(변혁)’을 언급했다. “오늘의 회의를 통해 우리는 변혁을 시작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정치적, 이념적 공세를 되찾을 것입니다.”

동독 공산당의 통치 안정화가 그의 목표임이 명확히 드러났다. 11월 9일 베를린장벽을 열어주어야 했고, 12월 6일 그도 쫓겨났다.

분단 80년, 조선노동당 창건 80돌을 맞아 10월 10일 김정은이 격정적으로 외쳤다.

“동지들!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80년사가 우리를 고무하고 있으며 더 거창하고 더 보람 있을 투쟁에로 떠밀고 있습니다.
당과 인민이 한뜻이 되고 한 몸이 되여 개척하고 승리로 빛내여온 위대한 80년에 이어 보다 영광스럽고 긍지 높을 위대한 력사의 총화를 위하여, 우리 인민의 꿈과 리상이 실현될 사회주의 위업의 종국적 완성을 위하여 용기백배, 신심도 드높이 나아갑시다.”

북한 주민, 당 정치국원, 국가보위성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정은이, 더 이상은 안 돼, 너는 떠나야만 해,” 누가 말해야 하나요!

자유는 쟁취하는 것입니다, 공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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