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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문] "라이프치히가 '영웅들의 도시'가 된 까닭...우리 한글날 일어난 사건" (최보식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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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24회 작성일 23-10-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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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문] "라이프치히가 '영웅들의 도시'가 된 까닭...우리 한글날 일어난 사건" (최보식의 언론, 2023.10.09)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11806


10월 9일, 34년 전에도 월요일이었던 이날 동독공산당이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인민을 굴종시켰던 동독 국가권력이 인민에게 굴복했다.

1989년 동독에서 전개된 평화혁명의 절정은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다. 그러나 연초부터 시작된 동독 주민의 ‘자유를 향한 행진’이 쟁취한 첫 번째 승리는 10월 9일 이루어졌다. 이 날을 기점으로 혁명의 횃불이 동독 전역에 확산되었음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시선을 동독에 쏟게 만들었다.

동독공산당 체제의 종말을 알린 동력(動力)은 동베를린에 이어 제2의 대도시이자 도서박람회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이프치히에서 뿜어져 나왔다. 중심은 성 니콜라이교회(St. Nikolaikirche)였다.

6월 4일 천안문 인민 봉기에 대한 ‘중국식 해법’, 총격을 가하고 탱크로 덮친 강경진압이 재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라이프치히 시민들을 극도로 긴장하게 했다. 그러나 자유에의 외침은 국가권력의 폭력 행사와 체포에도 굴하지 않았다.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는 9월 4일 월요일부터 매주 월요일 정례적으로 기획·실행되었다. 이른바 ‘월요 시위(Montagsdemonstrationen)’의 규모는 갈수록 커졌다. 참가자가 수천에서 2만 명까지 들쭉날쭉했지만, 인민경찰(Volkspolizei)과 비밀경찰 슈타지(Stasi)는 10월 초까지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 시위대를 포위하여 두들겨 패고 수갑을 채웠다.

이틀 전 10월 7일, 동베를린에서 장엄하게 거행된 건국 40주년 행사에서 변화를 거부한 동독공산당과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 이들에게 변화를 요구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놓았다. 자유의 의지를 갑옷으로 두른 시민들은 더 이상 겁내지 않았다.

동독공산당 라이프치히 지구지도부는 성 니콜라이교회에서 10월 9일 평화기도회가 끝난 후 또 월요시위가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발’의 숨통을 조기에 끊기 위해 공산당은 3,000명의 무장 병력, 5,000명의 치안 병력을 동원했다. 도시 외곽에는 1,500명 인민군도 투입에 대기하도록 했다. 700명의 충직한 동무들에게는 성 니콜라이교회 좌석을 막아서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교회 실무집행부는 바삐 움직였다. 이른 아침 먼저 비폭력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교향악단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지구공산당의 문화담당 제1서기와 다른 두 명의 서기에게 비폭력을 호소하고 이들을 설득했다. 카바레 예술가 베른트-루츠 랑에와 신학자 페터 찜머만도 동참했다.

‘라이프치히 6인(Leipziger Sechs)’으로 명명된 이들의 호소문, “우리 모두는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길 원하고, 이를 위해 모두가 신중하기를 시급히 요청한다”를 마주어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직접 읽고 전 시에 알렸다.

이날 평화기도회는 라이프치히 곳곳의 교회에서도 동시에 열렸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마태수난곡’을 초연하고 성가대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던 인근의 토마스교회도 처음으로 동참했다. 예배를 마친 시민들은 칼-마르크스 광장(현재 아우구스투스 광장)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는 불어났다.

7만 명의 시민, “우리가 바로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와 “폭력 반대(Keine Gewalt)”를 외치는 인민들과 인민경찰·슈타지는 대치해야 했다. 군중들은 시가지 행진을 시작했다. 진압부대가 오히려 시위대에 포위당했다.

공산당 지구책임자와 무력진압대장은 넋을 잃었다. 당시 동독 전역에 내려진 인민군의 ‘전투준비태세 강화’ 상황에서 행동에 나서야 했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동베를린의 중앙당지도부와는 연락조차 잘 되지 않았다. 그들조차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지 우왕좌왕이었다.

마침내 내무장관으로부터 진압대의 활동을 ‘자기 보호’에 제한하고 시위대를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구공산당이 항복한 것이다. 저녁 7시를 넘기며 지구당책임자는 동베를린에 보고했다, “시위대가 시내 중심가 전체를 일주해 행진했다, 이제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다.”

시위대는 저녁 8시 30분경 해산했다. 평화롭게 끝났다. 동독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경찰과 슈타지가 진압 시도를 하지 않았다. 1953년 6월 17일, 동독에서 일어난 최초의 인민봉기 때와는 달리 소련군 탱크들도 병영을 떠나지 않았다. ‘대형(大兄)’ 소련공산당이 더 이상 동독공산당을 돕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시민의 극적 승리는 극적으로 전파를 탔다. 두 명의 동베를린 영화제작자들이 서베를린에서 밀반입한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라이프치히 시위를 비밀리에 촬영했다. 필름은 즉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전달되었고, 시위 당일 밤 서독 방송에 보도되었다. 다음날 서독 제1 공영방송 ARD(우리의 KBS1)의 뉴스 ‘오늘의 소식(Tagesthemen)’은 동독에서 수만 명의 대규모 봉기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고 전 세계에 알렸다.

동독 주민들은 동독 공권력에 대한 라이프치히 시민의 승리에 고무되었다. 10월 16일 월요일, 15만 명의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동독 전역에 자유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0월 9일을 시작으로 베를린장벽 붕괴행 역사의 급류는 거침없이 흘렀다. 불과 이틀 전 공산당과 체제가 수백 년 지속될 것이라 부르짖었던 호네커는 10월 17일 자리에서 쫓겨났다.

라이프치히의 10월 9일이 없었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자유의 행진이 벌어졌던 라이프치히 입구 ​​거리의 도로표지판에는 ‘영웅들의 도시(Heldenstadt)’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라이프치히 시민, 동독 주민이 영웅이었다.

북한 주민 여러분, 시민 여러분, 자유를 원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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