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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토크] "날아올랐으나 추락해야만 했던 ‘자유’, 윤석열의 마지막 임무" (뉴스퀘스트,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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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2회 작성일 25-03-1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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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토크] "날아올랐으나 추락해야만 했던 ‘자유’, 윤석열의 마지막 임무" (뉴스퀘스트, 2025.03.10)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1004

<사진 1> 수습되는 빈프리트의 시신 [사진=picture-alliance/dpa]
<사진 2> 통일 이후 빈프리트가 추락했던 첼렌도르프에 세워진 그의 추념판 [사진=dpaLizenz]
<사진 3> 철조망 끼인 탈출 트럭, 왼쪽으로 흰색의 긴 콘크리트 베를린 장벽이 보인다. [사진=Foto: BStU, Ast. Potsdam, AU 2361/89, STA 5259, Bd. 1]


“됐다, 성공이다, 이젠 자유다.” 서베를린이 발아래 보이자 빈프리트는 소리없이 외쳤다. 하지만 그토록 열망했던 자유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풍선의 균형이 무너지고 서베를린, 그중에서도 가장 자유스럽고 베를린자유대학교가 위치한 미군 구역 첼렌도르프에 추락했다.

36년 전, 1989년 3월 7일~8일 밤에 일어난 일이다. 1956년생, 33세가 채 되기 전 빈프리트 프로이덴베르크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1979년 직접 제작한 풍선기구를 타고 서독으로 탈출한 슈트렐지크와 베첼 가족 사건은 동독 전역에서 화젯거리였다. 9월 16일, 동독 튀링겐주 푀스네크 출신의 두 가족, 8명이 열기구를 타고 접경선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에 성공한것이다.

빈프리트가 꿈을 가진 계기였다. 전기기술을 공부해 숙련공으로 일하던 그가 1989년 초 동베를린 소재 베를린 에너지공급기업 가스공급부에 일자리를 얻었다. 탈출 기구풍선에 사용할 가스를 용이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다.

빈프리트와 아내 사비네는 시간을 가지며 신중하게 탈출을 준비했다. 더욱 옥죄어진 통제 속에 큰 열기구풍선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빈프리트는 슈트렐지크와 베첼 가족이 사용했던 프로판가스 대신 공기보다 가볍고 냉매로 사용되는 프레온가스를 풍선에 채우기로 했다.

슈트렐지크와 베첼이 사용했던 튼튼한 방수천을 많이 확보해 의심을 받는 대신 부부는 농부들이 생산품 포장에 사용하는 폴리에틸렌호일로 풍선을 만들기로 했다. 소량씩 여러 차례 나누어 샀다.

남들이 자는 깊은 밤에 높이 13m 지름 11m 크기로, 여러 장 여러 겹의 폴리에틸렌호일을 접착해 천으로 만들고, 그 위에 지지망을 얹어 풍선으로 조립해 프레온가스를 주입하는 것이다. 아래에는 가로세로 40cm, 두께 2cm의 나무판을 달았다. 이것이 빈프리트와 사비네를 서베를린으로 실어주어야 했다.

1989년 3월 7~8일 밤에 날씨가 좋을 것이고, ‘자유’의 서쪽으로 날아가기에 적당한 풍향이라는 예보가 나오자 부부는 결행을 결심했다. 자정이 가까이 오자 동베를린 중심구에 가까운 자택 아파트를 떠나 북동쪽 교외 블랑켄부르크로 차를 몰았다. 서베를린 판코우와 바로 마주보는 곳이다. 그곳은 또한 빈프리트가 일하는 가스공급소가 위치한 장소다.

가스를 넣자 풍선이 점점 커지며 올라가자 베를린의 밤하늘에 하얗게 빛이 났다. 늦은 시간 집으로 가던 한 노동자가 그것을 보았고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빈프리트와 사비네를 지탱할 충분한 가스가 미쳐 채워지기 전인 새벽 2시경 부부는 경찰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풍선이 완전히 부풀어 오르지 않아 두사람은 도저히 무리였다.

당황 상황에서 부부는 떨어지기로 결정했다. 사비네는 도망치고, 빈프리트는풍선을 묶었던 끈을 자르고 경찰이 폭발 위험 생각에 사격을 주저하는 사이 밤하늘로 올랐다. 풍선은 계산과 다르게 더 빠르고 더 높이 올라갔다. 빈프리트는 추위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얇은 나무판자에 떨면서 웅크리고 앉아 동서베를린 접경선을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서베를린 경찰이 풍선 비행을 재구성해 본 결과, 이륙 직후 2000m 이상의 고도로 즉시 상승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 시각 기온은 영하 6도였고, 가벼운 옷차림이었던 빈프리트는 거의 얼어갔다.

불과 십여 분이면 도착해야 할 자유의 땅을 그는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베를린을 가로질러 내려오면서 5시간 이상 떠다녔다. 날이 밝아오면서 서베를린 상공에 있음을 알아챘다.

가스를 조절해 방출하는 밸브 같은, 풍선 고도를 낮출 장비가 없었던 빈프리트는 서베를린 테겔 공항 상공을 날며 풍선의 균형·상승을 위해 매달아두었던 무게자루를 떨어뜨려 자신의 곤경을 알리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공항 교통관제센터 레이더도 그를 포착하지 못했다. 대신 풍선은 계속 올라갔다.

이른 새벽 서베를린 토이펠스베르크를 산책하던 한 행인이 상공의 높은 하늘에 나는 풍선을 발견했다. 곧 첼렌도르프로 추락했다. 풍선은 스페인거리와 포츠담거리가 마주치는 나무에 걸렸다.

빈프리트의 시신은 얼마 후 약 1㎞ 떨어진 리마거리의 어느 집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남쪽으로 그곳에서 2㎞, 풍선에서 1㎞ 더 날았다면 포츠담, 그가 탈출하고자 했던 다시 동독 땅이었다.

서베를린 경찰은 조금만 더 가면 동독으로 진입할 것을 예상한 빈프리트가 풍선의 바닥판을 급격하게 기울여 고도를 낮추고자 시도했고, 그것이 치명적사고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사비네는 걸어서 자택으로 돌아갔다 기다리던 경찰에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3년의 보호관찰을 선고받았으나, 몇 달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빈프리트 사망 불과 이틀 후인 3월 10일에도 자유에의 결행이 있었다. 27세 학생과 친구 두 명이 슈타켄의 베를린 장벽을 대형 트럭으로 돌진해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세 청년은 트럭으로 두 개의 접경 철조망 울타리를 뚫어 콘크리트 장벽까지 다가가고, 거기서 사다리로 3.6m 높이의 담을 넘고자 했다. 하지만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트럭으로 첫 번째 울타리는 돌파했지만, 두 번째 울타리에 커다란 차량이 끼어 갇힌 것이다. 그들은 재빨리 나왔지만 트럭에서 사다리를 꺼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뛰어서 콘크리트 장벽으로 갔지만 높은 담을 넘을 수는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동독 경비대는 총격을 가했다. 한 명이 양쪽 허벅지에 총을 맞아 쓰러졌고, 다른 두 명은 항복해 모두 체포되었다. 비밀경찰 ‘슈타지(Stasi)’에 넘겨져 구금되었던 그들에게 포츠담법원은 5월 25일 3년 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빈프리트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다 숨진 마지막 희생자로 여겨진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자유를 찾아 행동했으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투사들의 정확한 수는 알지 못한다. 동독이 함구했고 감추었기 때문이다. 탈출자들이 공개적으로 등록하고 자유로의 행동을 일으킬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토록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그들에게는 절박했던 자유였다. 북한 주민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서, 현 처지에서 윤석열이 북한 주민의 자유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원된 북한군을 위해서는 그가 할 일이 있다.

지난 칼럼 ““윤석열의 마지막 임무”(2024.12.09)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정치적 역할, 운명이 앞으로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대통령 자리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이다. 첫째, 그가 주장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 국민이자 동족인 북한 주민이 무참히 살상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아픔을 견딜 수 없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주장해야 한다. (···)

무한지옥이라 할 전쟁 살육터에 몰아넣는 김정은에 비해, 북한 주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못 박은 윤석열이 그들의 삶과 생명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상황이 북한 주민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한민국이 다가가는 길이다.

동족임을 거부하는 김정은에 비해, 북한 주민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려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보여줄 수 있다. ‘북한 주민변화를 통한 북한 변화’의 실천이다.”

종전협상이 진행되며, 러시아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격전지 쿠르스크에서 푸틴에게 소모품이고 김정은에게는 ‘달러 박스’인 북한군, 우리 국민이 더 처참한 상황에 몰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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