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문] "문 정권은 채무자마냥 北 눈치 살피며 전단 살포자를 처벌해" (최보식의 언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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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98회 작성일 21-06-01 12:39본문
"문 정권은 채무자마냥 北 눈치 살피며 전단 살포자를 처벌해"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
‘산탄지뢰 70형’(Splittermine Modell-70), 이른바 SM-70은 ‘살인자동장치’다. 주민의 서독 행 탈출이 이어지자 동독은 1970년 접경선 447㎞에 걸쳐 7만1천 개 이상의 살인기계를 설치했다.
촉발선을 건드리면 전기가 흐르고 약 100g의 TNT가 폭발하면서 110여개의 쇳조각 탄환이 날아간다. 사정거리 120m 살인기계를 동독은 30m 간격에 삼중으로 설치하여 ‘공화국 탈출자’를 벌집이 되게 하였다. 빠져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새들로 인한 작동을 방지하기 위해 촉발선 위・아래에 방비 철선도 만들었다. 동독은 살인 장치는 물론이고 사살 사망자를 인정도 공개도 하지 않았다.
<사진>
SM-70의 설치도와 작동원리(위), 탄환(아래 중앙), 최초 형태(아래 오른쪽)와 가르텐쉬래거의 해체 시도 직후 덮개곽을 씌운 형태(아래 왼쪽) / 프리스터카테 접경박물관에서 손기웅 촬영
미하엘 가르텐쉬래거는 분단에 울고 자유에 몸을 바쳤다. 1944년 동베를린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동독이 1961년 베를린장벽을 세우고 전 접경지역을 지뢰, 벙커, 감시탑, 전류선, 군견 등으로 요새화하자 항거하였다. 17세의 나이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반체제 선동, 체제 전복, 방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정치범이 된 그에게 검찰 구형은 사형이었다.
독방에서 10년간 외로움과 병과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던 그는 1971년 ‘자유거래’(Freikauf)를 통해 서독으로 와 고대하던 자유를 찾았다. 동독은 4만 마르크를 챙겼다.
함부르크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도 그는 동쪽의 동포를 잊지 않았고, 동독 독재체제에 맞섰다. 탈출자 지원 단체에 가담하여 31명의 탈출을 도와주었고, 직접 개입하여 6명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동포에 대한 그의 애정은 멈추지 않아 비인간적인 SM-70을 직접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976년 가르텐쉬래거는 두 차례나 접경선에 접근하여 동독 쪽으로 향하여 설치된 살인 장치의 촉발선과 전기접전단자 사이 선을 절단하여 2개를 해체하는데 성공했다.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이를 보도하였다.
<사진>
1961년 9월 동독에서 노동자계급・당・정부의 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을 당시 법정 사진(위 중앙), 가르텐쉬래거(위 오른쪽), 사망 직전인 1976년 4월 서독접경지역에서 동독지역을 바라보는 사진(아래 왼쪽), 사살된 그의 시신(중앙), 그리고 그를 기리는 십자가 / 프리스터카테 접경박물관에서 손기웅 촬영
살인기계 설치를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동독은 4월 24일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요원 29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였고, 4월 30일 프리스터카테 인근 접경선에서 세 번째 해체를 시도하던 그를 사살하였다. 동독은 격려금을 수여하고, 살인 장치에는 상자형 곽을 씌워 보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텐쉬래거 사건을 계기로 살인자동장치의 작동 원리와 해체 방법이 언론을 통해 상세히 알려지자 이를 이용하여 격발을 피한 탈출자는 멈추지 않았다.
이 땅에 와 자유를 찾은 북한 이탈 주민들이 북쪽의 가족, 친지, 동포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한다.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전단을 통해서라도 바깥세상을 알려주려 한다.
북한이 남쪽으로 전단을 날리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만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문 정권이 북한 주민의 삶과 인권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손 놓고 정부만 쳐다봐야 하나.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간섭하고 비방하고, 위아래 가리지 않고 대통령에게까지 대놓고 막말을 퍼부어대는 북한은 전단 살포에 무력으로 위협한다. 문 정권은 빚 갚는 채무자마냥 북쪽의 눈치를 살피며 이들을 법으로 처벌하려 한다. 탈출자들을 토끼 사냥하듯 정조준 사살하고 고사포로 벌집을 만드는 북쪽의 비인간성에는 입을 닫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인도적인 사건이 꼬리를 무는, 문제 많은 우리 사회다. 동시에 고통을 겪는 이들을 따뜻하게 안으려는 아름다운 우리 사회이기도 하다. 슬픔을 나누고 힘이 되기 위해 어려운 삶 속에서도 기꺼이 나서는 이웃들이다. 그런 마음과 가슴으로 자신들만 자유를 누리는 북한이탈 주민들이 북쪽 동포에게 느낄 아픈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는가, 그런 사회가 될 수는 없는가.
2021년 봄의 한반도를 하늘에서 지켜본다면 가르텐쉬래거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마음일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끼 덮인 작은 목조건물 프리스터카테는 마을회관이 되었다. 2층은 분단 상황을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으로 가르텐쉬래거를 추념(追念)하고 있다.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
‘산탄지뢰 70형’(Splittermine Modell-70), 이른바 SM-70은 ‘살인자동장치’다. 주민의 서독 행 탈출이 이어지자 동독은 1970년 접경선 447㎞에 걸쳐 7만1천 개 이상의 살인기계를 설치했다.
촉발선을 건드리면 전기가 흐르고 약 100g의 TNT가 폭발하면서 110여개의 쇳조각 탄환이 날아간다. 사정거리 120m 살인기계를 동독은 30m 간격에 삼중으로 설치하여 ‘공화국 탈출자’를 벌집이 되게 하였다. 빠져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새들로 인한 작동을 방지하기 위해 촉발선 위・아래에 방비 철선도 만들었다. 동독은 살인 장치는 물론이고 사살 사망자를 인정도 공개도 하지 않았다.
<사진>
SM-70의 설치도와 작동원리(위), 탄환(아래 중앙), 최초 형태(아래 오른쪽)와 가르텐쉬래거의 해체 시도 직후 덮개곽을 씌운 형태(아래 왼쪽) / 프리스터카테 접경박물관에서 손기웅 촬영
미하엘 가르텐쉬래거는 분단에 울고 자유에 몸을 바쳤다. 1944년 동베를린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동독이 1961년 베를린장벽을 세우고 전 접경지역을 지뢰, 벙커, 감시탑, 전류선, 군견 등으로 요새화하자 항거하였다. 17세의 나이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반체제 선동, 체제 전복, 방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정치범이 된 그에게 검찰 구형은 사형이었다.
독방에서 10년간 외로움과 병과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던 그는 1971년 ‘자유거래’(Freikauf)를 통해 서독으로 와 고대하던 자유를 찾았다. 동독은 4만 마르크를 챙겼다.
함부르크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도 그는 동쪽의 동포를 잊지 않았고, 동독 독재체제에 맞섰다. 탈출자 지원 단체에 가담하여 31명의 탈출을 도와주었고, 직접 개입하여 6명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동포에 대한 그의 애정은 멈추지 않아 비인간적인 SM-70을 직접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976년 가르텐쉬래거는 두 차례나 접경선에 접근하여 동독 쪽으로 향하여 설치된 살인 장치의 촉발선과 전기접전단자 사이 선을 절단하여 2개를 해체하는데 성공했다.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이를 보도하였다.
<사진>
1961년 9월 동독에서 노동자계급・당・정부의 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을 당시 법정 사진(위 중앙), 가르텐쉬래거(위 오른쪽), 사망 직전인 1976년 4월 서독접경지역에서 동독지역을 바라보는 사진(아래 왼쪽), 사살된 그의 시신(중앙), 그리고 그를 기리는 십자가 / 프리스터카테 접경박물관에서 손기웅 촬영
살인기계 설치를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동독은 4월 24일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요원 29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였고, 4월 30일 프리스터카테 인근 접경선에서 세 번째 해체를 시도하던 그를 사살하였다. 동독은 격려금을 수여하고, 살인 장치에는 상자형 곽을 씌워 보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텐쉬래거 사건을 계기로 살인자동장치의 작동 원리와 해체 방법이 언론을 통해 상세히 알려지자 이를 이용하여 격발을 피한 탈출자는 멈추지 않았다.
이 땅에 와 자유를 찾은 북한 이탈 주민들이 북쪽의 가족, 친지, 동포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한다.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전단을 통해서라도 바깥세상을 알려주려 한다.
북한이 남쪽으로 전단을 날리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만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문 정권이 북한 주민의 삶과 인권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손 놓고 정부만 쳐다봐야 하나.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간섭하고 비방하고, 위아래 가리지 않고 대통령에게까지 대놓고 막말을 퍼부어대는 북한은 전단 살포에 무력으로 위협한다. 문 정권은 빚 갚는 채무자마냥 북쪽의 눈치를 살피며 이들을 법으로 처벌하려 한다. 탈출자들을 토끼 사냥하듯 정조준 사살하고 고사포로 벌집을 만드는 북쪽의 비인간성에는 입을 닫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인도적인 사건이 꼬리를 무는, 문제 많은 우리 사회다. 동시에 고통을 겪는 이들을 따뜻하게 안으려는 아름다운 우리 사회이기도 하다. 슬픔을 나누고 힘이 되기 위해 어려운 삶 속에서도 기꺼이 나서는 이웃들이다. 그런 마음과 가슴으로 자신들만 자유를 누리는 북한이탈 주민들이 북쪽 동포에게 느낄 아픈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는가, 그런 사회가 될 수는 없는가.
2021년 봄의 한반도를 하늘에서 지켜본다면 가르텐쉬래거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마음일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끼 덮인 작은 목조건물 프리스터카테는 마을회관이 되었다. 2층은 분단 상황을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으로 가르텐쉬래거를 추념(追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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