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문] "‘인권대통령’은 북한 주민 인권에 입 닫고, 그 눈과 귀까지 아예 막아" (최보식의 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74회 작성일 21-04-29 14:43본문
서베를린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어가는 페흐터
[손기웅의 통일문] "‘인권대통령’은 북한 주민 인권에 입 닫고, 그 눈과 귀까지 아예 막아" (최보식의 언론, 2021.04.15)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678
‘인권대통령’ 문재인은 북한 주민의 인권에 입을 닫았다.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으로 그들의 눈과 귀를 아예 막아버리려고 한다. 남으로 탈출한 동포는 북으로 ‘고이 모셔’ 돌려보냈다.
운동권 시절 국내의 인권문제에 강력하게 개입해 줄 것을 미국의 조야(朝野)에 적극 요청했던 자칭 진보, 자유, 민주주의자들이 북한 인권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내정 간섭’이라 비난한다.
1961년 8월 13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베를린 동서쪽 접경선에 동독의 인민경찰, 교통경찰, 전투건설노동자들이 몰려나와 모든 연결도로를 차단했다. 160㎞에 걸쳐 블록과 콘크리트로 장벽을 쌓아 올렸다. 불과 두 달 전 6월 15일 동독 수반 발터 울브리히트는 “어느 누구도 어떠한 장벽을 세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사기를 쳤었다.
절망한 동베를린 시민은 벽 사이로 만남을 찾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벽을 넘어서고자 했다. 동독은 ‘공화국탈출’(Republikflucht)은 ‘말살’(vernichten)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장벽을 중무장하고 지뢰까지 부설했다.
십 일 만에 최초의 희생이 발생했다. 24세 청년 귄터 리트핀이 8월 24일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되었다. 자유를 향한 동독 주민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다.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최대 445명이 살해되었고, 7만1천여 명이 탈출죄로 투옥되었다.
1962년 8월 17일 동베를린 건설노동자 18세 페터 페흐터는 친구 헬무트 쿨바이크와 함께 ‘체크 포인트 찰리’ 인근의 장벽을 넘다 총알 세례를 받았다. 쿨바이크가 성공한 반면, 페흐터는 벽 앞에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도와달라고 했지만 동독군은 그를 방치했다. 담장 위 서쪽에서는 바로 밑에서 죽어가는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동독은 페흐터와 같은 범죄자의 생명보다 용감한 동독군의 생명이 훨씬 더 값지다면서, “장벽을 넘으려는 누구도 피와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1989년 1월 동독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베를린장벽이 앞으로 100년 더 서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몇 달 뒤 베를린 장벽과 함께 자신도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장벽에서의 마지막 희생자는 2월 5일 20세 크리스 괴프로이였다. 웨이터이자 체조선수였던 그는 체조세계챔피언, 자유로운 삶, 미국 여행이라는 세 가지 꿈을 가졌다. 괴프로이는 친구 크리스티안 과디안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여 거의 성공할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총격을 받아 괴프로이는 즉사했고, 과디안은 총을 맞은 채 체포되었다.
과디안이 직전에 여권을 벽 서쪽으로 던져 사건과 그의 이름이 서방에 알려졌다. 서독은 동독에서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과디안을 10월 17일 동독당국에 대가를 지불하고 정치범을 데려오는 ‘자유거래’(Freikauf)를 통해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3주 후 통한과 수치의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1990년 통일한 독일은 형법의 ‘소급적용금지’ 조항을 피하기 위해 법률을 정비했다. 1996년 10월 24일 독일헌법청은 동독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국제법적으로 인권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소급적용 금지 조항을 제한한다고 결정했다.
통일독일은 분단 시기 동독이 자행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행태를 기록한 ‘잘쯔기터 증거 및 기록보존센터’와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의 자료를 근거로 페흐터를 사살했던 2명의 동독군을 법정에 세웠다. 징역 20개월, 21개월의 유죄선고가 각각 내려졌다.
베를린지방법원에서 112건의 소송이 진행되었고, 246명의 사살자 혹은 사살가담자에 대해 법적 책임이 물어졌다. 마지막 법적 처리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5주년이 되는 2004년 11월 9일 끝났다.
장벽을 넘으려다 죽은 사람들과 잡혀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그 장벽을 넘고자 했던 이유는 벽 너머에 더 많은 자유와 민주, 인권과 복지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잘 살고 싶은’ 마음은 독일인이나 한국인이나, 동독 주민이나 북한 주민이나 다를 바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입각하면 우리 국민인 북한 주민에게 북한 정권이 자행하는 반인권적 범죄 행위에 대해, 정치적 정략적 고려 없이, 확고하고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비난하고 항의하고 기록하여, 우리 정부가 남북한 모든 주민의 인간다운 삶에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정부임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부가 해야 할 일이자 대통령의 법적 의무다.
페흐터 사건 당시 우연히 현장에 있었던 카메라맨 헤르베르트 에른스트는 통한의 상황을 필름에 생생히 담았다. 냉전의 비극을 가장 충격적으로 증언한 1분짜리 이 영상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스페인의 팝가수 니노 브라보는 페흐터의 죽음을 애도하며 1972년 노래 ‘자유’(Libre)를 발표했다.
‘Libre’를 가슴에 묻으며 물어보자, 우리는 남한 주민인가 대한민국 국민인가.
[손기웅의 통일문] "‘인권대통령’은 북한 주민 인권에 입 닫고, 그 눈과 귀까지 아예 막아" (최보식의 언론, 2021.04.15)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678
‘인권대통령’ 문재인은 북한 주민의 인권에 입을 닫았다.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으로 그들의 눈과 귀를 아예 막아버리려고 한다. 남으로 탈출한 동포는 북으로 ‘고이 모셔’ 돌려보냈다.
운동권 시절 국내의 인권문제에 강력하게 개입해 줄 것을 미국의 조야(朝野)에 적극 요청했던 자칭 진보, 자유, 민주주의자들이 북한 인권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내정 간섭’이라 비난한다.
1961년 8월 13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베를린 동서쪽 접경선에 동독의 인민경찰, 교통경찰, 전투건설노동자들이 몰려나와 모든 연결도로를 차단했다. 160㎞에 걸쳐 블록과 콘크리트로 장벽을 쌓아 올렸다. 불과 두 달 전 6월 15일 동독 수반 발터 울브리히트는 “어느 누구도 어떠한 장벽을 세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사기를 쳤었다.
절망한 동베를린 시민은 벽 사이로 만남을 찾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벽을 넘어서고자 했다. 동독은 ‘공화국탈출’(Republikflucht)은 ‘말살’(vernichten)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장벽을 중무장하고 지뢰까지 부설했다.
십 일 만에 최초의 희생이 발생했다. 24세 청년 귄터 리트핀이 8월 24일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되었다. 자유를 향한 동독 주민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다.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최대 445명이 살해되었고, 7만1천여 명이 탈출죄로 투옥되었다.
1962년 8월 17일 동베를린 건설노동자 18세 페터 페흐터는 친구 헬무트 쿨바이크와 함께 ‘체크 포인트 찰리’ 인근의 장벽을 넘다 총알 세례를 받았다. 쿨바이크가 성공한 반면, 페흐터는 벽 앞에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도와달라고 했지만 동독군은 그를 방치했다. 담장 위 서쪽에서는 바로 밑에서 죽어가는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동독은 페흐터와 같은 범죄자의 생명보다 용감한 동독군의 생명이 훨씬 더 값지다면서, “장벽을 넘으려는 누구도 피와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1989년 1월 동독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베를린장벽이 앞으로 100년 더 서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몇 달 뒤 베를린 장벽과 함께 자신도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장벽에서의 마지막 희생자는 2월 5일 20세 크리스 괴프로이였다. 웨이터이자 체조선수였던 그는 체조세계챔피언, 자유로운 삶, 미국 여행이라는 세 가지 꿈을 가졌다. 괴프로이는 친구 크리스티안 과디안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여 거의 성공할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총격을 받아 괴프로이는 즉사했고, 과디안은 총을 맞은 채 체포되었다.
과디안이 직전에 여권을 벽 서쪽으로 던져 사건과 그의 이름이 서방에 알려졌다. 서독은 동독에서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과디안을 10월 17일 동독당국에 대가를 지불하고 정치범을 데려오는 ‘자유거래’(Freikauf)를 통해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3주 후 통한과 수치의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1990년 통일한 독일은 형법의 ‘소급적용금지’ 조항을 피하기 위해 법률을 정비했다. 1996년 10월 24일 독일헌법청은 동독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국제법적으로 인권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소급적용 금지 조항을 제한한다고 결정했다.
통일독일은 분단 시기 동독이 자행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행태를 기록한 ‘잘쯔기터 증거 및 기록보존센터’와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의 자료를 근거로 페흐터를 사살했던 2명의 동독군을 법정에 세웠다. 징역 20개월, 21개월의 유죄선고가 각각 내려졌다.
베를린지방법원에서 112건의 소송이 진행되었고, 246명의 사살자 혹은 사살가담자에 대해 법적 책임이 물어졌다. 마지막 법적 처리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5주년이 되는 2004년 11월 9일 끝났다.
장벽을 넘으려다 죽은 사람들과 잡혀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그 장벽을 넘고자 했던 이유는 벽 너머에 더 많은 자유와 민주, 인권과 복지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잘 살고 싶은’ 마음은 독일인이나 한국인이나, 동독 주민이나 북한 주민이나 다를 바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입각하면 우리 국민인 북한 주민에게 북한 정권이 자행하는 반인권적 범죄 행위에 대해, 정치적 정략적 고려 없이, 확고하고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비난하고 항의하고 기록하여, 우리 정부가 남북한 모든 주민의 인간다운 삶에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정부임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부가 해야 할 일이자 대통령의 법적 의무다.
페흐터 사건 당시 우연히 현장에 있었던 카메라맨 헤르베르트 에른스트는 통한의 상황을 필름에 생생히 담았다. 냉전의 비극을 가장 충격적으로 증언한 1분짜리 이 영상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스페인의 팝가수 니노 브라보는 페흐터의 죽음을 애도하며 1972년 노래 ‘자유’(Libre)를 발표했다.
‘Libre’를 가슴에 묻으며 물어보자, 우리는 남한 주민인가 대한민국 국민인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