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문] "인권 외면해온 ‘인권 대통령’ 문 정권의 민낯이 국제사회에 " (최보식의 언론,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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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33회 작성일 21-03-26 14:49본문
[손기웅의 통일문] "인권 외면해온 ‘인권 대통령’ 문 정권의 민낯이 국제사회에 " (최보식의 언론, 2021.03.24)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438
부끄럽다. 3월 20일 알려진 미국무부의 ‘2020년 인권보고서’에 남북 정권의 인권문제가 담겼다. 북한의 강제실종과 고문, 정치범 수용 등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 유린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인권 대통령’을 자부한 문재인 정권의 부정부패(조국·윤미향), 성추행(박원순·오거돈) 사례와 더불어 통일부가 대북 인권단체 25곳에 대해 감사를 하고, 일부 대북 사회단체의 활동을 제한했다는 내용이 적시되었다. 김정은과의 대화·협력, ‘쇼’를 위하여 북한 인권을 외면해온 문 정권의 민낯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나타난 세 가지 상징적 사례가 문 정권의 반인권적 행태를 보여준다. 2019년 11월 7일 남쪽으로 탈출한 북한 어부 2명의 강제 북송, 2020년 9월 22일 우리 공무원이 서해 북한지역 해변에서 살해·화형 당한 데 대한 무대응, 2020년 12월 14일 ‘대북전단살포 금지법’(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의 국회 통과이다.
‘대북전단살포 금지법’의 경우, 여당이 국회에서 숫자로 밀어붙인 ‘합법성’을 거친 만큼 법적으로 문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두 사건은 언젠가 반드시 국내외법을 적용하여 심판되어야만 한다. 향후 동일한 상황이 재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독일에서 그렇게 되었다.
1966년 8월 29일 서베를린 주민 하인쯔 쉬미트가 동독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당시 47세인 쉬미트는 정신질환을 앓았고, 사건 직전에 이혼한 뒤 노숙자쉼터에 거주하였다. 사건 당일 그는 사회복지청에 금전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아버지 역시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술을 잔뜩 마신 그는 강물에 들어갔고, 동베를린 쪽으로 헤엄쳐갔다.
동서베를린 경계선에서 근무하던 동독군이 그를 발견하고 경고사격을 했다. 현장에 출동한 서베를린 경찰이 “쏘지 마라, 그는 술에 취했고 그냥 물속에 뛰어든 것뿐이다”라고 소리 질렀으나, 동독군은 정신병으로 인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를 향해 사격했다.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쉬미트는 동쪽 강둑으로 헤엄쳐서 적재소 뒤에 숨었다. 서쪽 강둑에 위치한 서베를린 경찰이 가만히 거기에 있으라고 외쳤으나, 쉬미트는 잠깐의 휴식 후에 다시 물에 뛰어들어 서쪽 강둑으로 헤엄쳐 오려고 사력을 다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거듭하는 그에게 동독군은 조준 사격했다. 5발의 총탄을 맞았다. 쉬미트는 서쪽 강둑에 닿을 수 있었으나 곧 숨졌다.
서베를린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한발의 총탄이 그의 목뼈를 부수어 놓았다. 서베를린 지역에서는 동독군이 쏜 수많은 탄흔이 발견되었다. 총알이 가정집의 창문을 뚫었고, 근처를 지나가던 자동차문에 박혔다.
동독은 기관지 <새로운 독일>(Neues Deutschland, 1966.8.30)을 통해 쉬미트 사건을 동독에 대한 “의도적인 새로운 도발”이라면서, 침범되어서는 안 될 영토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민군이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총격을 가했던 인민군 1명에게는 ‘국경근무모범메달’을, 3명에게는 ‘국경수비대근무휘장’을 포상으로 주었다.
1983년 4월 10일 드레비츠(Drewitz) 동독 국경검문소에서 검문을 받던 서독여행객 45세 루돌프 부르케르트가 사망했다. 동독은 그의 사망원인이 심장경색이라고 했다.
부르케르트는 사망 직전에 동서독 간 연결지역에서 동독의 친척을 만나 안전벨트, 스피커, 초콜릿 등의 선물을 전했다.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이를 놓치지 않았고, 국경검문소에서 출국심사를 기다리던 그를 데리고 가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할 때까지 심문했다. 서독의 바이에른 주지사 프란쯔 요셉 슈트라우스는 목격자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부르케르트가 세 명의 동독 세관원들에 의해 구타를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살인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4월 26일 역시 서독여행객인 하인쯔 몰덴하우어가 바르타(Wartha) 동독 국경검문소에서 세관심사를 받던 중 사망했다. 동독은 이번에도 ‘심장마비’라 주장했다.
분단 기간 동안 동독 국경검문소에서 사망한 서독여행객의 수는 최소한 350명에 달했다. 그들의 사망 원인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동독은 사망확인서에 대개 ‘심근경색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적었다.
쉬미트 사건은 우리 공무원의 피살 사건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피해자가 비무장의 민간인이었고, 피해자가 상대방 측의 지역에 진입했으며, 상대방 측의 총격에 의해 사살되었다.
두 사건 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쉬미트의 경우 어떻게 되었건 자의에 의해 상대방 측의 영토에 진입했으나, 우리의 경우 그 원인이 아직 불투명하다. 쉬미트의 경우 경고사격을 받고도 피해자가 다시 자의에 의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살되었으나, 우리의 경우 체포 후 탈출하였다는 징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쉬미트의 경우 동독군이 월경의 의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던 반면, 우리의 경우 북한이 체포 후 월경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쉬미트의 경우 서베를린이 시신을 확보하여 사망의 원인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던 반면에, 우리의 경우 북한이 시신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사인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과 우리 공무원의 피살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동독의 발표대로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심장병은 즉각적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는 질환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기진맥진한 사람에 대해 북한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도 응급구호가 아니라 방치와 사살, 화형으로 행동했다. 이상을 종합하면 우리의 피살 사건이 더 확실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쉬미트 사건은 베를린장벽이 세워지는 등 1960년대 냉전의 한복판에서 동서독이 극하게 대립한 시기에,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은 1980년대 중반 동서독이 관계 개선을 추진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문제는 서독이 두 유형의 사건 모두에 있어서 동독에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냉전의 골이 깊었던 시기에 일어난 쉬미트 사건의 경우에 서독이 별다른 대응조치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동서독의 정부 수반이 상호 관계를 개선하려는 상황에서 일어난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의 경우, 서독이 정치적 고려에 의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당시 서독의 콜 총리는 동독 공산당서기장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추진하던 때였다. 이로 인해 서독 정부는 자국민의 사망 사건에 대해 강력한 항의, 대항 조치, 관계 악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동일 사건이 계속 일어나도 동독은 개선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서독은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할 근거도 방법도 없었다.
서독이 반인도적 범죄 행위에 대해 정치적 고려가 아닌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국내적으로 힘을 모으고,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여, 강력하게 항의하고 적극적 조치를 취했더라면, 분단 기간 최소 350명의 국경검문소 사망자의 수가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1966년 냉전기에 일어났던 쉬미트 사건에 대해서도 서독이 의지만 있었다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냉전의 상황에서도 이미 동서독은 1962년부터 이른바 ‘자유거래’(Freikauf), 즉 서독이 동독에 대가(현금이 아니라 대 공산권 수출금지 품목에 저촉되지 않는 현물)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들을 서독으로 데려와 자유롭게 하는 ‘비밀거래’를 추진하고 있었다. 서독이 이러한 통로를 통해 비록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총격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1983년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동서독 간에는 협의 채널이 가동 중인 상황이었다. 서독 정부는 동독 국경검문소에 모든 왕래여행객의 건강에 이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응급시설과 치료시설의 강화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서독이 경비를 부담하는 방향으로 협의하여 사망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 실제 서독은 1983년 외환위기에 빠진 동독에 차관을 주는 대신, 동독이 접경지역 장벽/철조망에 설치한 인명 살상용 자동발사장치를 철거하도록 한 바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동독의 반인권적 행태에 대한 서독 정부의 적극적, 일관적 의지였다. 서독은 정치적 상황, 정치적 고려에 의해 대응을 달리했다. 동독 주민의 삶과 인권 개선에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서독이지만, 수뇌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동독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도 했다는 사실이 통일 이후 밝혀졌다.
서독이 제대로 처리한 사례도 있다. 동독에서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서독으로 올 경우에 서독은 국내법절차를 진행하였다. 예를 들어 1980년 11월 4일 동독 국경수비대원 에곤 붕에가 동료인 울리히 슈타인하우어를 살해하고 서베를린으로 탈출하였다. 서베를린 검찰청은 1981년 그를 기소하고 청소년형법을 적용하여 징역 6년에 처했다.
우리 공무원 피살은 2008년 금강산 박왕자 여사 피살 사건에 이은 두 번째 사망 사건이다. 향후 이러한 불행한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대비하여 정부는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사건의 정치화를 지양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국내외 인권단체와 협력하여 북한에 책임자 처벌,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요구를 성명과 서면으로 전달하고, 북한이 이를 거부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했다.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최소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서는 총격을 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끌어야 했다.
북한 도발에 의한 우리 국민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법무부의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적극 가동해야 한다. 향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위해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중심으로 관련 국내외 민간단체가 협력하여 북한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적 범죄 행위를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해야 한다. 북한이 반인도적 범죄 행위를 하는데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범죄가 낱낱이 기록되고 있음을 사건마다 공개적으로, 확인되거나 추측되는 가해자의 이름과 직책과 함께 발표해야 한다.
제대로 된 대한민국의 정부라면 헌법정신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인, 2019년 탈북해 남쪽에 온 북한 어부에게 국내법을 적용하여 북한당국의 주장대로 과연 죄를 지었는지 살펴봤어야만 했고, 만약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국내법절차에 따라 처리했어야 했다.
탈북 주민의 강제 북송이 공개적으로 혹은 아무도 모르게 다시 일어날까, 우리 국민이 다시 북한에 의해 살해될까 걱정된다. 김정은의 답방을 갈망하면서 북한과 ‘마지막 쇼’를 꿈꾸는 문 정권 아래 또 어떠한 반인권적 행태가 반복될까 두렵다.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438
부끄럽다. 3월 20일 알려진 미국무부의 ‘2020년 인권보고서’에 남북 정권의 인권문제가 담겼다. 북한의 강제실종과 고문, 정치범 수용 등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 유린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인권 대통령’을 자부한 문재인 정권의 부정부패(조국·윤미향), 성추행(박원순·오거돈) 사례와 더불어 통일부가 대북 인권단체 25곳에 대해 감사를 하고, 일부 대북 사회단체의 활동을 제한했다는 내용이 적시되었다. 김정은과의 대화·협력, ‘쇼’를 위하여 북한 인권을 외면해온 문 정권의 민낯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나타난 세 가지 상징적 사례가 문 정권의 반인권적 행태를 보여준다. 2019년 11월 7일 남쪽으로 탈출한 북한 어부 2명의 강제 북송, 2020년 9월 22일 우리 공무원이 서해 북한지역 해변에서 살해·화형 당한 데 대한 무대응, 2020년 12월 14일 ‘대북전단살포 금지법’(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의 국회 통과이다.
‘대북전단살포 금지법’의 경우, 여당이 국회에서 숫자로 밀어붙인 ‘합법성’을 거친 만큼 법적으로 문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두 사건은 언젠가 반드시 국내외법을 적용하여 심판되어야만 한다. 향후 동일한 상황이 재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독일에서 그렇게 되었다.
1966년 8월 29일 서베를린 주민 하인쯔 쉬미트가 동독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당시 47세인 쉬미트는 정신질환을 앓았고, 사건 직전에 이혼한 뒤 노숙자쉼터에 거주하였다. 사건 당일 그는 사회복지청에 금전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아버지 역시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술을 잔뜩 마신 그는 강물에 들어갔고, 동베를린 쪽으로 헤엄쳐갔다.
동서베를린 경계선에서 근무하던 동독군이 그를 발견하고 경고사격을 했다. 현장에 출동한 서베를린 경찰이 “쏘지 마라, 그는 술에 취했고 그냥 물속에 뛰어든 것뿐이다”라고 소리 질렀으나, 동독군은 정신병으로 인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를 향해 사격했다.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쉬미트는 동쪽 강둑으로 헤엄쳐서 적재소 뒤에 숨었다. 서쪽 강둑에 위치한 서베를린 경찰이 가만히 거기에 있으라고 외쳤으나, 쉬미트는 잠깐의 휴식 후에 다시 물에 뛰어들어 서쪽 강둑으로 헤엄쳐 오려고 사력을 다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거듭하는 그에게 동독군은 조준 사격했다. 5발의 총탄을 맞았다. 쉬미트는 서쪽 강둑에 닿을 수 있었으나 곧 숨졌다.
서베를린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한발의 총탄이 그의 목뼈를 부수어 놓았다. 서베를린 지역에서는 동독군이 쏜 수많은 탄흔이 발견되었다. 총알이 가정집의 창문을 뚫었고, 근처를 지나가던 자동차문에 박혔다.
동독은 기관지 <새로운 독일>(Neues Deutschland, 1966.8.30)을 통해 쉬미트 사건을 동독에 대한 “의도적인 새로운 도발”이라면서, 침범되어서는 안 될 영토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민군이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총격을 가했던 인민군 1명에게는 ‘국경근무모범메달’을, 3명에게는 ‘국경수비대근무휘장’을 포상으로 주었다.
1983년 4월 10일 드레비츠(Drewitz) 동독 국경검문소에서 검문을 받던 서독여행객 45세 루돌프 부르케르트가 사망했다. 동독은 그의 사망원인이 심장경색이라고 했다.
부르케르트는 사망 직전에 동서독 간 연결지역에서 동독의 친척을 만나 안전벨트, 스피커, 초콜릿 등의 선물을 전했다.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이를 놓치지 않았고, 국경검문소에서 출국심사를 기다리던 그를 데리고 가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할 때까지 심문했다. 서독의 바이에른 주지사 프란쯔 요셉 슈트라우스는 목격자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부르케르트가 세 명의 동독 세관원들에 의해 구타를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살인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4월 26일 역시 서독여행객인 하인쯔 몰덴하우어가 바르타(Wartha) 동독 국경검문소에서 세관심사를 받던 중 사망했다. 동독은 이번에도 ‘심장마비’라 주장했다.
분단 기간 동안 동독 국경검문소에서 사망한 서독여행객의 수는 최소한 350명에 달했다. 그들의 사망 원인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동독은 사망확인서에 대개 ‘심근경색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적었다.
쉬미트 사건은 우리 공무원의 피살 사건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피해자가 비무장의 민간인이었고, 피해자가 상대방 측의 지역에 진입했으며, 상대방 측의 총격에 의해 사살되었다.
두 사건 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쉬미트의 경우 어떻게 되었건 자의에 의해 상대방 측의 영토에 진입했으나, 우리의 경우 그 원인이 아직 불투명하다. 쉬미트의 경우 경고사격을 받고도 피해자가 다시 자의에 의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살되었으나, 우리의 경우 체포 후 탈출하였다는 징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쉬미트의 경우 동독군이 월경의 의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던 반면, 우리의 경우 북한이 체포 후 월경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쉬미트의 경우 서베를린이 시신을 확보하여 사망의 원인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던 반면에, 우리의 경우 북한이 시신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사인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과 우리 공무원의 피살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동독의 발표대로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심장병은 즉각적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는 질환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기진맥진한 사람에 대해 북한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도 응급구호가 아니라 방치와 사살, 화형으로 행동했다. 이상을 종합하면 우리의 피살 사건이 더 확실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쉬미트 사건은 베를린장벽이 세워지는 등 1960년대 냉전의 한복판에서 동서독이 극하게 대립한 시기에,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은 1980년대 중반 동서독이 관계 개선을 추진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문제는 서독이 두 유형의 사건 모두에 있어서 동독에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냉전의 골이 깊었던 시기에 일어난 쉬미트 사건의 경우에 서독이 별다른 대응조치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동서독의 정부 수반이 상호 관계를 개선하려는 상황에서 일어난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의 경우, 서독이 정치적 고려에 의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당시 서독의 콜 총리는 동독 공산당서기장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추진하던 때였다. 이로 인해 서독 정부는 자국민의 사망 사건에 대해 강력한 항의, 대항 조치, 관계 악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동일 사건이 계속 일어나도 동독은 개선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서독은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할 근거도 방법도 없었다.
서독이 반인도적 범죄 행위에 대해 정치적 고려가 아닌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국내적으로 힘을 모으고,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여, 강력하게 항의하고 적극적 조치를 취했더라면, 분단 기간 최소 350명의 국경검문소 사망자의 수가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1966년 냉전기에 일어났던 쉬미트 사건에 대해서도 서독이 의지만 있었다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냉전의 상황에서도 이미 동서독은 1962년부터 이른바 ‘자유거래’(Freikauf), 즉 서독이 동독에 대가(현금이 아니라 대 공산권 수출금지 품목에 저촉되지 않는 현물)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들을 서독으로 데려와 자유롭게 하는 ‘비밀거래’를 추진하고 있었다. 서독이 이러한 통로를 통해 비록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총격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1983년 부르케르트/몰덴하우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동서독 간에는 협의 채널이 가동 중인 상황이었다. 서독 정부는 동독 국경검문소에 모든 왕래여행객의 건강에 이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응급시설과 치료시설의 강화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서독이 경비를 부담하는 방향으로 협의하여 사망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 실제 서독은 1983년 외환위기에 빠진 동독에 차관을 주는 대신, 동독이 접경지역 장벽/철조망에 설치한 인명 살상용 자동발사장치를 철거하도록 한 바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동독의 반인권적 행태에 대한 서독 정부의 적극적, 일관적 의지였다. 서독은 정치적 상황, 정치적 고려에 의해 대응을 달리했다. 동독 주민의 삶과 인권 개선에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서독이지만, 수뇌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동독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도 했다는 사실이 통일 이후 밝혀졌다.
서독이 제대로 처리한 사례도 있다. 동독에서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서독으로 올 경우에 서독은 국내법절차를 진행하였다. 예를 들어 1980년 11월 4일 동독 국경수비대원 에곤 붕에가 동료인 울리히 슈타인하우어를 살해하고 서베를린으로 탈출하였다. 서베를린 검찰청은 1981년 그를 기소하고 청소년형법을 적용하여 징역 6년에 처했다.
우리 공무원 피살은 2008년 금강산 박왕자 여사 피살 사건에 이은 두 번째 사망 사건이다. 향후 이러한 불행한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대비하여 정부는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사건의 정치화를 지양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국내외 인권단체와 협력하여 북한에 책임자 처벌,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요구를 성명과 서면으로 전달하고, 북한이 이를 거부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했다.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최소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서는 총격을 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끌어야 했다.
북한 도발에 의한 우리 국민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법무부의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적극 가동해야 한다. 향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위해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중심으로 관련 국내외 민간단체가 협력하여 북한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적 범죄 행위를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해야 한다. 북한이 반인도적 범죄 행위를 하는데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범죄가 낱낱이 기록되고 있음을 사건마다 공개적으로, 확인되거나 추측되는 가해자의 이름과 직책과 함께 발표해야 한다.
제대로 된 대한민국의 정부라면 헌법정신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인, 2019년 탈북해 남쪽에 온 북한 어부에게 국내법을 적용하여 북한당국의 주장대로 과연 죄를 지었는지 살펴봤어야만 했고, 만약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국내법절차에 따라 처리했어야 했다.
탈북 주민의 강제 북송이 공개적으로 혹은 아무도 모르게 다시 일어날까, 우리 국민이 다시 북한에 의해 살해될까 걱정된다. 김정은의 답방을 갈망하면서 북한과 ‘마지막 쇼’를 꿈꾸는 문 정권 아래 또 어떠한 반인권적 행태가 반복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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