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문] "김여정에 '떼떼'로 비하된 문재인 정권,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배워라" (최보식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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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23회 작성일 21-03-26 14:42본문
[손기웅의 통일문] "김여정에 '떼떼'로 비하된 문재인 정권,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배워라" (최보식의 언론, 2021.03.18)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392
북한의 독한 막말이 끝없이 이어진다. 3월 16일 김여정은 노동신문의 공식 담화에서 문 정권을 “태생적 바보”, “떼떼”(말을 더듬는 바보) 등으로 비하했다. 북한과 ‘마지막 쇼’를 꿈꾸는 문 정권이 한미연합훈련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대폭 축소한 데 대해 “미친개를 순한 양으로 보아달라는 것과 다름없는 궤변”이라고 ‘화답’(火答)했다.
문제는 말만이 아닌 그들의 행동이다. 지난해 6월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이어 9월 22일에는 서해에서 우리 공무원을 살해하고 불태웠다. 김정은은 금년 초 당대회에서 핵무력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국방력에 의거해 조국 통일을 앞당기겠다고 선포까지 했으니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더 큰 문제는 문 정권의 어이없는 태도다. 공무원이 자진 월북한 것으로 ‘결정’한 군의 발표를 비웃듯 북한은 그가 탈출을 시도해 사살했다고 공개 성명을 내었다. 대통령도 군도 대응하지 않았다.
1961년 10월 27일 냉전 시기 유럽에서 가장 긴박했던 군사적 대치 상황이 베를린의 중앙에서 일어났다. 동서 베를린의 경계선에 위치하여 통로 역할을 한 미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에 수십 대의 미군과 소련군의 탱크가 대치했고,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다. 8월 13일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고 불과 몇 주 뒤 일어난 사태였다.
동독이 장벽을 세움에 따라 미군에 의해 설치된 체크포인트 찰리는 독일을 분단 점령한 전승 4국(미국, 영국, 프랑스, 당시 소련)의 군인과 가족, 외교관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통행 시 통제나 검문은 없었다.
갈등이 불거진 것은 동독이 민간인 복장의 미군과 군속에 대해 신분확인으로 통제하라는 명령이었다. 동독이 서베를린을 점령한 서방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이 누리는 특별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궁극적 목적은 서베를린으로부터 서방 연합군을 몰아내고, 베를린 전체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동독이 의도적으로 도발하고, 미국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살피려 했다.
사실 동독의 수도인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고, 서베를린에 서방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동독과 소련에게는 악몽이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소련이 1948년 6월 24일부터 1949년 5월 12일까지 서독(당시 서방연합군 점령지)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모든 육상의 통로를 막는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다. 냉전의 시작이었다.
미국이 중심이 된 서방연합군은 공중으로 이를 돌파했다. 생필품, 석탄, 자재 등 서베를린 시민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비행기로 실어 나르는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3~4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내리고 뜨는 ‘하늘다리’가 만들어졌다. 이를 총지휘한 사람이 서독지역 미군정사령관 루시우스 클레이 장군이었다.
10월 22일 한 미군 장교가 사복 차림으로 오페라를 보기 위해 동베를린에 위치한 극장으로 가려고 하자 동독경비대가 그를 저지하고 신분증을 요구하였다. 동독의 통제는 전승4국 간 합의를 위반한 것으로 미국의 항의는 당연했다.
동독이 조치를 풀지 않자 미국은 즉각 반응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은퇴 후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던, 누구보다 독일 상황을 잘 아는 클레이를 특보로 임명하고 베를린에 급파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자문하게 하였다. 클레이는 10월 25일 M48 전투탱크를 동원하고 무장병력을 체크포인트 찰리에 집결시키면서 미군의 자유로운 동베를린 통행을 압박했다. 영국군도 미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인근 티어가르텐에 탱크를 배치했다.
당황한 소련의 동베를린 책임자 안드레이 소로브예프와 미국의 앨버트 왓슨 간의 협상으로 미군은 탱크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다음 날 동독 정부의 지시로 동독경비대의 도발이 다시 이어졌다.
미군은 즉각 더 많은 탱크를 동원했고, 이번에는 소련군도 T54 전투탱크를 배치했다. 체크포인트 찰리를 사이에 두고 동서쪽 측면 도로에는 양군의 다른 수십 대의 탱크도 서로 엉키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군도 이번에는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지척 거리인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앞에 대기하며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이 폭발적 상황의 책임은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국가수반에 있었다. 그는 니키타 후르시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추진하고자 했던 국제 긴장완화 정책으로 인해 서베를린을 영구히 잃을까 우려했고, 자신의 의지를 서방연합국은 물론이고 소련에게도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다.
소련은 그에 의한 도발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으로서 동독과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전체를 원한 것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포성이 터질지 모를 상황이, 3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긴박한 시간이 초조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기(轉機)는 클레이의 초강경대응에서 마련되었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위해 긴급명령을 내렸다. 서베를린 내 미군 관할 지역인 그뤼네발트에 베를린장벽의 모형을 세우게 하고, 그것을 탱크로 부수고 돌파하게 했다.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는 훈련이었다. 클레이는 “만약 소련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으나, 만약 소련이 전쟁을 원한다면 우리는 전쟁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확고한 각오도 공표했다.
후르시초프에게 이 상황이 즉각 전달되었다. 그는 미국이 소련과 동독이 구축한 베를린장벽을 무력으로 짓밟을 의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전화기가 달아올랐다. 케네디는 사실 클레이의 너무나 적극적인 행동에 우려감도 가졌지만, 그것을 잘 활용했다. 후르시초프에게 그가 먼저 탱크를 뒤로 물려야 사태가 악화되지 않을 것임을 단호하게 알렸다.
후르시초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케네디에게 이번 사태가 울브리히트의 독단적 행동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남은 것은 어떻게 그가 체면을 손상하지 않고 사태를 해결하느냐였다.
10월 27일 11시 조금 전에 소련군의 탱크가 먼저 후퇴했고, 곧 이어 미군 탱크도 뒤로 물러섰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서로가 승리했다고 주장하면서, 각자 이 사태를 선전에 최대한 활용했다.
극적인 군사적 사태의 극적인 수습은 곧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낳았다. 1년 후 쿠바 미사일 위기 상황으로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의 문턱으로까지 다가갔을 때, 양국은 베를린 탱크 대치 사태 시 이용했던 외교 통로를 통해 협상하여 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체크포인트 찰리 사태의 발생은 동독과 소련의 합의 위반이 원인이었고, 문제 해결의 동력은 미군, 특히 클레이의 확고한 의지였다. 비록 케네디와 후르시초프 모두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었으나, 합의 위반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표명한 현장 지휘관의 판단과 결의가 케네디가 후르시초프를 물러서게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남북관계에서 군사적 돌발 사태, 위기 상황이 북한의 도발에 의해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와 문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를 압박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이 배제될 수 없는 현재의 시기다. 군은 북한이 도발할 경우,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군사적 판단과 결정을 과감하게 실행하여 문제 해결에, 우리 정부의 협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김관진 장관이 떠오른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 국방장관에 취임한 그는 “선 조치, 후 보고”를 명령했다. 북한이 다시 도발해 오면 강력히 대응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독 유학을 통해 체크포인트 찰리 사례를 잘 연구했을 김 장관의 소신이었다.
지난 분단 시기에 우리 군에는 그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수많은 무장(武將)이 있었다. 그러나 착잡한 현실은 북한이 쏜 미사일을 미사일이라 말하지 못하고, 도발을 도발로 인정하지 않는 문 정권 아래의 군이다.
체크포인트 찰리와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잘 극복한 케네디는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을 방문하였다. “나도 베를린의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선언했던 그 유명한 연설에 앞서 케네디는 동행한 클레이를 먼저 소개했고, 서베를린 시민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으로 감사를 표했다.
현재 베를린의 가장 아름다운 도로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 ‘클레이길’이다. 그 인근에는 자유대학교의 ‘케네디 연구소’가 있다. 클레이-케네디와 같은 듀엣이 절실한 2021년 봄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이다.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392
북한의 독한 막말이 끝없이 이어진다. 3월 16일 김여정은 노동신문의 공식 담화에서 문 정권을 “태생적 바보”, “떼떼”(말을 더듬는 바보) 등으로 비하했다. 북한과 ‘마지막 쇼’를 꿈꾸는 문 정권이 한미연합훈련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대폭 축소한 데 대해 “미친개를 순한 양으로 보아달라는 것과 다름없는 궤변”이라고 ‘화답’(火答)했다.
문제는 말만이 아닌 그들의 행동이다. 지난해 6월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이어 9월 22일에는 서해에서 우리 공무원을 살해하고 불태웠다. 김정은은 금년 초 당대회에서 핵무력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국방력에 의거해 조국 통일을 앞당기겠다고 선포까지 했으니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더 큰 문제는 문 정권의 어이없는 태도다. 공무원이 자진 월북한 것으로 ‘결정’한 군의 발표를 비웃듯 북한은 그가 탈출을 시도해 사살했다고 공개 성명을 내었다. 대통령도 군도 대응하지 않았다.
1961년 10월 27일 냉전 시기 유럽에서 가장 긴박했던 군사적 대치 상황이 베를린의 중앙에서 일어났다. 동서 베를린의 경계선에 위치하여 통로 역할을 한 미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에 수십 대의 미군과 소련군의 탱크가 대치했고,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다. 8월 13일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고 불과 몇 주 뒤 일어난 사태였다.
동독이 장벽을 세움에 따라 미군에 의해 설치된 체크포인트 찰리는 독일을 분단 점령한 전승 4국(미국, 영국, 프랑스, 당시 소련)의 군인과 가족, 외교관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통행 시 통제나 검문은 없었다.
갈등이 불거진 것은 동독이 민간인 복장의 미군과 군속에 대해 신분확인으로 통제하라는 명령이었다. 동독이 서베를린을 점령한 서방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이 누리는 특별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궁극적 목적은 서베를린으로부터 서방 연합군을 몰아내고, 베를린 전체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동독이 의도적으로 도발하고, 미국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살피려 했다.
사실 동독의 수도인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고, 서베를린에 서방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동독과 소련에게는 악몽이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소련이 1948년 6월 24일부터 1949년 5월 12일까지 서독(당시 서방연합군 점령지)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모든 육상의 통로를 막는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다. 냉전의 시작이었다.
미국이 중심이 된 서방연합군은 공중으로 이를 돌파했다. 생필품, 석탄, 자재 등 서베를린 시민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비행기로 실어 나르는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3~4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내리고 뜨는 ‘하늘다리’가 만들어졌다. 이를 총지휘한 사람이 서독지역 미군정사령관 루시우스 클레이 장군이었다.
10월 22일 한 미군 장교가 사복 차림으로 오페라를 보기 위해 동베를린에 위치한 극장으로 가려고 하자 동독경비대가 그를 저지하고 신분증을 요구하였다. 동독의 통제는 전승4국 간 합의를 위반한 것으로 미국의 항의는 당연했다.
동독이 조치를 풀지 않자 미국은 즉각 반응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은퇴 후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던, 누구보다 독일 상황을 잘 아는 클레이를 특보로 임명하고 베를린에 급파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자문하게 하였다. 클레이는 10월 25일 M48 전투탱크를 동원하고 무장병력을 체크포인트 찰리에 집결시키면서 미군의 자유로운 동베를린 통행을 압박했다. 영국군도 미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인근 티어가르텐에 탱크를 배치했다.
당황한 소련의 동베를린 책임자 안드레이 소로브예프와 미국의 앨버트 왓슨 간의 협상으로 미군은 탱크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다음 날 동독 정부의 지시로 동독경비대의 도발이 다시 이어졌다.
미군은 즉각 더 많은 탱크를 동원했고, 이번에는 소련군도 T54 전투탱크를 배치했다. 체크포인트 찰리를 사이에 두고 동서쪽 측면 도로에는 양군의 다른 수십 대의 탱크도 서로 엉키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군도 이번에는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지척 거리인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앞에 대기하며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이 폭발적 상황의 책임은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국가수반에 있었다. 그는 니키타 후르시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추진하고자 했던 국제 긴장완화 정책으로 인해 서베를린을 영구히 잃을까 우려했고, 자신의 의지를 서방연합국은 물론이고 소련에게도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다.
소련은 그에 의한 도발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으로서 동독과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전체를 원한 것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포성이 터질지 모를 상황이, 3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긴박한 시간이 초조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기(轉機)는 클레이의 초강경대응에서 마련되었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위해 긴급명령을 내렸다. 서베를린 내 미군 관할 지역인 그뤼네발트에 베를린장벽의 모형을 세우게 하고, 그것을 탱크로 부수고 돌파하게 했다.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는 훈련이었다. 클레이는 “만약 소련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으나, 만약 소련이 전쟁을 원한다면 우리는 전쟁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확고한 각오도 공표했다.
후르시초프에게 이 상황이 즉각 전달되었다. 그는 미국이 소련과 동독이 구축한 베를린장벽을 무력으로 짓밟을 의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전화기가 달아올랐다. 케네디는 사실 클레이의 너무나 적극적인 행동에 우려감도 가졌지만, 그것을 잘 활용했다. 후르시초프에게 그가 먼저 탱크를 뒤로 물려야 사태가 악화되지 않을 것임을 단호하게 알렸다.
후르시초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케네디에게 이번 사태가 울브리히트의 독단적 행동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남은 것은 어떻게 그가 체면을 손상하지 않고 사태를 해결하느냐였다.
10월 27일 11시 조금 전에 소련군의 탱크가 먼저 후퇴했고, 곧 이어 미군 탱크도 뒤로 물러섰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서로가 승리했다고 주장하면서, 각자 이 사태를 선전에 최대한 활용했다.
극적인 군사적 사태의 극적인 수습은 곧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낳았다. 1년 후 쿠바 미사일 위기 상황으로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의 문턱으로까지 다가갔을 때, 양국은 베를린 탱크 대치 사태 시 이용했던 외교 통로를 통해 협상하여 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체크포인트 찰리 사태의 발생은 동독과 소련의 합의 위반이 원인이었고, 문제 해결의 동력은 미군, 특히 클레이의 확고한 의지였다. 비록 케네디와 후르시초프 모두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었으나, 합의 위반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표명한 현장 지휘관의 판단과 결의가 케네디가 후르시초프를 물러서게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남북관계에서 군사적 돌발 사태, 위기 상황이 북한의 도발에 의해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와 문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를 압박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이 배제될 수 없는 현재의 시기다. 군은 북한이 도발할 경우,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군사적 판단과 결정을 과감하게 실행하여 문제 해결에, 우리 정부의 협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김관진 장관이 떠오른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 국방장관에 취임한 그는 “선 조치, 후 보고”를 명령했다. 북한이 다시 도발해 오면 강력히 대응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독 유학을 통해 체크포인트 찰리 사례를 잘 연구했을 김 장관의 소신이었다.
지난 분단 시기에 우리 군에는 그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수많은 무장(武將)이 있었다. 그러나 착잡한 현실은 북한이 쏜 미사일을 미사일이라 말하지 못하고, 도발을 도발로 인정하지 않는 문 정권 아래의 군이다.
체크포인트 찰리와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잘 극복한 케네디는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을 방문하였다. “나도 베를린의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선언했던 그 유명한 연설에 앞서 케네디는 동행한 클레이를 먼저 소개했고, 서베를린 시민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으로 감사를 표했다.
현재 베를린의 가장 아름다운 도로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 ‘클레이길’이다. 그 인근에는 자유대학교의 ‘케네디 연구소’가 있다. 클레이-케네디와 같은 듀엣이 절실한 2021년 봄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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