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1] "성지(聖地)가 된 하이델베르크" (매일경제,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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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24회 작성일 21-07-22 17:38본문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1] "성지(聖地)가 된 하이델베르크" (매일경제, 2021.07.05)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1/07/645606/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는 독일에 남아있는 과거 분단의 상흔과 통일운동의 현장을 구석구석 찾아다닌 결과물로, 훗날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순례의 기록입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사진 한 장이었다.
나와 가족의 역사를 만든 곳이고, 나의 통일 역정(歷程)의 출발선이 된 곳이다. 아홉 살이던가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한 권 펼치는 순간 무언가 떨어졌다. 집어 든 빛바랜 흑백사진에는 평온히 흐르는 강, 절대 무너지지 않을 듯 버티고선 돌다리, 부서진 연붉은 고성(古城)이 그 너머에 담겨 있었다. 귀퉁이에는 '네카어 강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am Neckar)라 쓰여 있었다.
<사진>
기억을 더듬어 다시 찍은 하이델베르크 /사진=손기웅
그날부터 하이델베르크에 빠졌다. 꼭 가봐야 할 동경의 장소, 아직 가보지도 않은 그곳에 노스탤지어도 느꼈다. 그리고 결심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사진이 보여준 하이델베르크 그 장소에 꼭 서기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도 독일 언어와 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괴테문화원에 다녔다. 나라가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 아니고, 자본과 자원이 많고 시장이 큰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독일 유학 생각은 굳어졌다. 큰 차이보다 분단이란 동질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마침내 1986년 4월 26일 토요일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다. 앵커리지를 지나는 순간 체르노빌 원전이 터졌다.
뮌헨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해 바로 그 장소, 네카어강과 다리 그리고 고성을 배경으로 감격의 첫 사진을 찍었다. 1년 후에는 아내와 함께, 또 1년 후에는 첫아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배경으로 추억을 생각하고 만들었다.
1989년 초 베를린자유대학으로 옮긴 후에는 1992년 귀국까지 하이델베르크 그 자리에 서지 못했다. 그리고 1997년, 그사이에 태어난 둘째를 포함하여 전 가족이 하이델베르크를 찾아 가족의 역사를 기념했다.
독일에서 분단과 통일을 보고 듣고 느낀 이후 지금까지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 11월 9일)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통일문제를 전업(全業)으로 연구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각오로 한반도 통일을 고민하고 있다. 자연히 독일 사례를 연구하면서 해마다 수차례 독일을 방문했고, 가능한 한 하이델베르크 그 장소에 서고 있다.
첫아이는 베를린에서 영화를 그리고 둘째는 바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우리 가족만의 독일 역사를 만들고 있다. 하이델베르크가 그 중심에 놓여 있고, 가족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하이델베르크 시지(市誌)에 '손가(孫家)의 하이델베르크 이야기'(The Son Family's Heidelberg Story)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2013년부터 '국제하이델베르크클럽'(Heidelberg Club International)의 회원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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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시지에 게재된 가족 이야기 /사진=손기웅
하이델베르크는 유난히 한국인과 일본인이 즐겨 찾고, 중심가 하웁트슈트라세는 관광객이 사계절 북적인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수십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하이델베르크대학교(1386년 개교), 부서진 성 지하에 놓인 높이 8m 용량 22만ℓ의 거대한 와인 저장용 '하이델베르크술통', 아기자기하고 보석같이 아름다운 강변 언덕의 저택들, 강 건너편 철학자가 사색에 잠기거나 학생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였다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
이들보다 한 편의 영화가 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칼스베르크(Karlsberg)의 황태자가 유학차 온 하이델베르크에서 하숙집 소녀를 사랑하면서 펼쳐지는 아련한 러브 스토리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 1954)이다. 특히 당대 최고의 테너 마리오 란자가 부른 권주가(勸酒歌) '축배의 노래'(Drink, Drink, Drink!)와 마지막 이별의 노래 '내 마음 깊은 곳'(Deep in My Heart) 장면은 첫사랑의 설렘을, 추억을 가진 모든 이들의 가슴에 다가갔을 것이다.
<사진>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영어·독일어 광고
2020년 초봄, 구 동서독 접경선 1393㎞의 순례를 위해 독일을 찾았다. 코로나19가 그곳에서도 막 기승을 부릴 당시, 하이델베르크 그곳에서 베를린의 결심을 되새기고, 백두산으로 이어져야만 할 통일길을 다시 다짐하며 끈을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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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초봄 하이델베르크 그곳에 선 필자.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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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
베를린 장벽 붕괴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통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통일연구원에 봉직했으며, 지금은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한국DMZ학회장, 한-독통일포럼 공동대표, 중국 천진외대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통일: 쟁점과 과제 1, 2', '30년 독일통일의 순례: 동서독 접경 1,393㎞, 그뤼네스 반트를 종주하다', '통일, 가지 않은 길로 가야만 하는 길', '통일, 온 길 갈 길' 등 저서가 있다.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1/07/645606/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는 독일에 남아있는 과거 분단의 상흔과 통일운동의 현장을 구석구석 찾아다닌 결과물로, 훗날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순례의 기록입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사진 한 장이었다.
나와 가족의 역사를 만든 곳이고, 나의 통일 역정(歷程)의 출발선이 된 곳이다. 아홉 살이던가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한 권 펼치는 순간 무언가 떨어졌다. 집어 든 빛바랜 흑백사진에는 평온히 흐르는 강, 절대 무너지지 않을 듯 버티고선 돌다리, 부서진 연붉은 고성(古城)이 그 너머에 담겨 있었다. 귀퉁이에는 '네카어 강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am Neckar)라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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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다시 찍은 하이델베르크 /사진=손기웅
그날부터 하이델베르크에 빠졌다. 꼭 가봐야 할 동경의 장소, 아직 가보지도 않은 그곳에 노스탤지어도 느꼈다. 그리고 결심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사진이 보여준 하이델베르크 그 장소에 꼭 서기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도 독일 언어와 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괴테문화원에 다녔다. 나라가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 아니고, 자본과 자원이 많고 시장이 큰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독일 유학 생각은 굳어졌다. 큰 차이보다 분단이란 동질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마침내 1986년 4월 26일 토요일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다. 앵커리지를 지나는 순간 체르노빌 원전이 터졌다.
뮌헨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해 바로 그 장소, 네카어강과 다리 그리고 고성을 배경으로 감격의 첫 사진을 찍었다. 1년 후에는 아내와 함께, 또 1년 후에는 첫아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배경으로 추억을 생각하고 만들었다.
1989년 초 베를린자유대학으로 옮긴 후에는 1992년 귀국까지 하이델베르크 그 자리에 서지 못했다. 그리고 1997년, 그사이에 태어난 둘째를 포함하여 전 가족이 하이델베르크를 찾아 가족의 역사를 기념했다.
독일에서 분단과 통일을 보고 듣고 느낀 이후 지금까지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 11월 9일)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통일문제를 전업(全業)으로 연구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각오로 한반도 통일을 고민하고 있다. 자연히 독일 사례를 연구하면서 해마다 수차례 독일을 방문했고, 가능한 한 하이델베르크 그 장소에 서고 있다.
첫아이는 베를린에서 영화를 그리고 둘째는 바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우리 가족만의 독일 역사를 만들고 있다. 하이델베르크가 그 중심에 놓여 있고, 가족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하이델베르크 시지(市誌)에 '손가(孫家)의 하이델베르크 이야기'(The Son Family's Heidelberg Story)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2013년부터 '국제하이델베르크클럽'(Heidelberg Club International)의 회원도 되었다.
<사진>
하이델베르크 시지에 게재된 가족 이야기 /사진=손기웅
하이델베르크는 유난히 한국인과 일본인이 즐겨 찾고, 중심가 하웁트슈트라세는 관광객이 사계절 북적인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수십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하이델베르크대학교(1386년 개교), 부서진 성 지하에 놓인 높이 8m 용량 22만ℓ의 거대한 와인 저장용 '하이델베르크술통', 아기자기하고 보석같이 아름다운 강변 언덕의 저택들, 강 건너편 철학자가 사색에 잠기거나 학생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였다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
이들보다 한 편의 영화가 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칼스베르크(Karlsberg)의 황태자가 유학차 온 하이델베르크에서 하숙집 소녀를 사랑하면서 펼쳐지는 아련한 러브 스토리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 1954)이다. 특히 당대 최고의 테너 마리오 란자가 부른 권주가(勸酒歌) '축배의 노래'(Drink, Drink, Drink!)와 마지막 이별의 노래 '내 마음 깊은 곳'(Deep in My Heart) 장면은 첫사랑의 설렘을, 추억을 가진 모든 이들의 가슴에 다가갔을 것이다.
<사진>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영어·독일어 광고
2020년 초봄, 구 동서독 접경선 1393㎞의 순례를 위해 독일을 찾았다. 코로나19가 그곳에서도 막 기승을 부릴 당시, 하이델베르크 그곳에서 베를린의 결심을 되새기고, 백두산으로 이어져야만 할 통일길을 다시 다짐하며 끈을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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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초봄 하이델베르크 그곳에 선 필자.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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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
베를린 장벽 붕괴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통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통일연구원에 봉직했으며, 지금은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한국DMZ학회장, 한-독통일포럼 공동대표, 중국 천진외대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통일: 쟁점과 과제 1, 2', '30년 독일통일의 순례: 동서독 접경 1,393㎞, 그뤼네스 반트를 종주하다', '통일, 가지 않은 길로 가야만 하는 길', '통일, 온 길 갈 길'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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