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문] "15만 평양 시민 앞 문 대통령의 격정 연설엔 본인만 감동했을 뿐" (최보식의 언론, …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29회 작성일 21-04-29 14:48본문
[손기웅의 통일문] "15만 평양 시민 앞 문 대통령의 격정 연설엔 본인만 감동했을 뿐" (최보식의 언론, 2021.04.22)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755
문재인 대통령에게 되는 일이 없는 남북관계다. 탈북자 강제 송환,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 제정, 끊임없는 대화 제안에도 북이 화답은커녕 거친 비난과 도발로 대응한다. 마지막 명줄로 여겼던 도쿄올림픽에도 불참을 선언했다. 이제 ‘9·19 평양 연설’의 좋았던 기억이나 반추하고 있을려나.
“브란트가 온다!” 1970년 3월 19일 최초의 독-독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독 에어푸르트(Erfurt)에는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쪽의 귀빈이 도착할 역에는 물론이고 회담장소인 ‘호텔 에어푸르트 호프’ 광장에도 환영 인파와 동독 보안요원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하루 전 서독 연방정보국(BND)은 특급기밀을 입수해 서독 내각에 전달했다. 동독공산당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주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비밀리에 실시했다는 것이다. ‘동독이 당신의 조국인가?’란 질문에 70%의 노동자가 ‘아니오’라고, ‘독일’이 나의 조국이라고 응답했다. 큰 충격을 받은 동독 지도부 사이에서 정상회담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특히 에리히 호네커(훗날 공산당서기장)가 서독과 관계 정상화 구상에 반대했다는 내용이었다.
회담 당일 서독 연방정보국은 정상회담 개최 장소의 분위기를 시시각각으로 송신했다. 시간이 갈수록 동독 주민의 흥분이 높아간다, 분명히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한 동독공산당의 선전과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독 당국은 ‘라이프찌히 박람회’에서 늘 하던 대로 모든 창문과 상점에 공산당과 동독을 찬양하는 문구로 장식하고, 회담 장소에도 ‘동원된 인력’으로 가득 차도록 했다. 선동가 1,000명을 배치하여 군중들이 모이면 동독 체제를 찬양하는 정치선동을 할 것도 계획했다.
서독 수상이 박수를 받거나 환호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도 하달했다. 물론 의례적으로 서독 수상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군중도 마련했고, 이를 위해 학생들이 동원되어 에어푸르트로 향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마지막 순간까지 동독 주민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하지 못했다. 조직된 공산당원들의 행진과 동독 청소년들의 친정부 시위, 혹은 자신에 대한 환영의 환호가 있을까? 운집한 군중 속에서 빌리 슈토프 동독 수상의 구호들이 터져 나오게 계획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브란트가 에어푸르트역에 도착하기 전부터 동독이 친 차단막을 넘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역에 운집했다. 군중들이 역 쪽을 보지 못하도록 동독당국이 전차로 시야를 막았고, 동독 요원조차 당시의 상황을 ‘폭발 직전의 상황’이라고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는 서독 연방정보국의 급전이 올라왔다.
역에서 브란트를 맞이하지 못한 4천~5천 명의 군중들은 정상회담 개최 호텔로 향했다. 브란트가 슈토프와 함께 호텔 앞에 내려 30미터를 걸어 입구로 가는 순간 모든 저지선은 무너졌다. 서독 연방정보국도 전혀 예상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열화와 같은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TV방송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브란트 얼굴이 잡혔다.
브란트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군중들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 창문으로(Willy Brandt ans Fenster)”. 정확히 9시 45분 브란트가 2층 창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군중들을 바라보는 그에게 동독 주민은 환호의 소리를 질렀고,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빌리, 빌리, 빌리 ....” 빌리 슈토프를 외치는 함성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동독공산당이 군중들 사이에 심어놓은 요원들도 이 상황에서 얼어붙어 넋을 잃고 지켜볼 따름이었다.
2018년 9월 19일 능라도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5만 여명의 평양 시민을 앞에 두고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여러분의 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께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라고 격정적 연설을 했다.
반면에 그날 빌리 브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독 주민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2년 뒤 ‘기본조약’이 체결됐고, 정권이 바뀌고 보수정부에서 더욱 활성화된 양독 간 교류협력의 초석을 닦았다. 동독 주민의 인권이 개선되어 상호 방문, 서신 교환, 라디오·TV 청취와 시청이 가능해졌다.
문 대통령의 열변에는 아무런 결실이 없다. 대통령이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설과 정상회담, 통일·대북정책을 펼쳤어야 했다. 5년의 국정 참여와 4년의 국정 운영 동안 북한 주민과 탈북자를 외면했던 그다. 2021년 4월 현재, 대통령의 감동은 여전할 것이나 북한 주민의 삶도 여전히 고통스럽다.
통일 직후인 1990년 11월 17일 브란트는 에어푸르트 호텔의 창문에 다시 섰다. 현재 그 건물의 지붕에는 ‘WILLY BRANDT ANS FENSTER’라는 기념판이 세워졌고, 벽면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날인 1989년 11월 10일 행한 그의 연설 “함께 속한 것(민족)이 이제 함께 자란다(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ört)”가 새겨져있다. 앞 광장의 이름은 ‘빌리 브란트’이다.
http://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755
문재인 대통령에게 되는 일이 없는 남북관계다. 탈북자 강제 송환,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 제정, 끊임없는 대화 제안에도 북이 화답은커녕 거친 비난과 도발로 대응한다. 마지막 명줄로 여겼던 도쿄올림픽에도 불참을 선언했다. 이제 ‘9·19 평양 연설’의 좋았던 기억이나 반추하고 있을려나.
“브란트가 온다!” 1970년 3월 19일 최초의 독-독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독 에어푸르트(Erfurt)에는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쪽의 귀빈이 도착할 역에는 물론이고 회담장소인 ‘호텔 에어푸르트 호프’ 광장에도 환영 인파와 동독 보안요원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하루 전 서독 연방정보국(BND)은 특급기밀을 입수해 서독 내각에 전달했다. 동독공산당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주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비밀리에 실시했다는 것이다. ‘동독이 당신의 조국인가?’란 질문에 70%의 노동자가 ‘아니오’라고, ‘독일’이 나의 조국이라고 응답했다. 큰 충격을 받은 동독 지도부 사이에서 정상회담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특히 에리히 호네커(훗날 공산당서기장)가 서독과 관계 정상화 구상에 반대했다는 내용이었다.
회담 당일 서독 연방정보국은 정상회담 개최 장소의 분위기를 시시각각으로 송신했다. 시간이 갈수록 동독 주민의 흥분이 높아간다, 분명히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한 동독공산당의 선전과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독 당국은 ‘라이프찌히 박람회’에서 늘 하던 대로 모든 창문과 상점에 공산당과 동독을 찬양하는 문구로 장식하고, 회담 장소에도 ‘동원된 인력’으로 가득 차도록 했다. 선동가 1,000명을 배치하여 군중들이 모이면 동독 체제를 찬양하는 정치선동을 할 것도 계획했다.
서독 수상이 박수를 받거나 환호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도 하달했다. 물론 의례적으로 서독 수상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군중도 마련했고, 이를 위해 학생들이 동원되어 에어푸르트로 향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마지막 순간까지 동독 주민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하지 못했다. 조직된 공산당원들의 행진과 동독 청소년들의 친정부 시위, 혹은 자신에 대한 환영의 환호가 있을까? 운집한 군중 속에서 빌리 슈토프 동독 수상의 구호들이 터져 나오게 계획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브란트가 에어푸르트역에 도착하기 전부터 동독이 친 차단막을 넘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역에 운집했다. 군중들이 역 쪽을 보지 못하도록 동독당국이 전차로 시야를 막았고, 동독 요원조차 당시의 상황을 ‘폭발 직전의 상황’이라고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는 서독 연방정보국의 급전이 올라왔다.
역에서 브란트를 맞이하지 못한 4천~5천 명의 군중들은 정상회담 개최 호텔로 향했다. 브란트가 슈토프와 함께 호텔 앞에 내려 30미터를 걸어 입구로 가는 순간 모든 저지선은 무너졌다. 서독 연방정보국도 전혀 예상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열화와 같은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TV방송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브란트 얼굴이 잡혔다.
브란트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군중들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 창문으로(Willy Brandt ans Fenster)”. 정확히 9시 45분 브란트가 2층 창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군중들을 바라보는 그에게 동독 주민은 환호의 소리를 질렀고,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빌리, 빌리, 빌리 ....” 빌리 슈토프를 외치는 함성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동독공산당이 군중들 사이에 심어놓은 요원들도 이 상황에서 얼어붙어 넋을 잃고 지켜볼 따름이었다.
2018년 9월 19일 능라도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5만 여명의 평양 시민을 앞에 두고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여러분의 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께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라고 격정적 연설을 했다.
반면에 그날 빌리 브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독 주민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2년 뒤 ‘기본조약’이 체결됐고, 정권이 바뀌고 보수정부에서 더욱 활성화된 양독 간 교류협력의 초석을 닦았다. 동독 주민의 인권이 개선되어 상호 방문, 서신 교환, 라디오·TV 청취와 시청이 가능해졌다.
문 대통령의 열변에는 아무런 결실이 없다. 대통령이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설과 정상회담, 통일·대북정책을 펼쳤어야 했다. 5년의 국정 참여와 4년의 국정 운영 동안 북한 주민과 탈북자를 외면했던 그다. 2021년 4월 현재, 대통령의 감동은 여전할 것이나 북한 주민의 삶도 여전히 고통스럽다.
통일 직후인 1990년 11월 17일 브란트는 에어푸르트 호텔의 창문에 다시 섰다. 현재 그 건물의 지붕에는 ‘WILLY BRANDT ANS FENSTER’라는 기념판이 세워졌고, 벽면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날인 1989년 11월 10일 행한 그의 연설 “함께 속한 것(민족)이 이제 함께 자란다(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ört)”가 새겨져있다. 앞 광장의 이름은 ‘빌리 브란트’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