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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9] "자유행 통로 동베를린 서독상주대표부" (매일경제,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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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67회 작성일 21-11-0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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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9] "자유행 통로 동베를린 서독상주대표부" (매일경제, 2021.08.30)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1/08/30718/

동베를린에 서독상주대표부(Ständige Vertretung der Bundesrepublik)가 들어섰다. 「동서독기본조약」(1972.12.21) 제8조에 의거해 1974년 5월 2일부터 본과 동베를린에 각각의 대표부를 연 것이다. 자유에 목마른 동독 주민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 동베를린 서독상주대표부와 통제하는 동독경찰 / 사진=Bundesarchiv

동독은 주민의 서독 여행을 불허하다가 서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그리고 국제적 압력에 의해 관련 규정을 마련해야만 했다. 특히 1975년 동독도 서명한 '헬싱키최종의정서'(유럽안보협력회의 CSCE의 출발)는 가족의 만남과 재결합, 여행의 자유를 명확히 하고 있어, 서독과 국제사회는 이를 근거로 동독을 압박했다.

그러나 동독은 주민의 여행허가신청을 시간을 끌면서 처리하지 않거나 허락하지 않았다. 극히 제한된 수만이 허가되었다.

동독 주민이 스스로 행동에 나섰다, 탈출이다. 베를린장벽이나 동서독 접경장벽을 넘어서, 터널을 뚫어서, 자동차나 기차에 숨어서, 헤엄쳐서, 배나 요트로, 행글라이더나 기구를 타고, 심지어는 잠수함을 만들어서 자유를 찾고자 했다.

서독상주대표부가 새로운 방법이었다. 자유행 건물 진입의 최초 대상은 동베를린의 미국대사관이었다. 1984년 1월 6명의 동독 주민이 대사관에 진입하여 서독행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수많은 해외 정치인들의 방문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동독은 이 불쾌한 사태를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고자 했다. 미국과 협의하여 점거자들을 외교 차량을 이용해 즉시 서독으로 보냈다.

전술적으로 아주 잘못한 선택이었다. 서독의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고, 동독 주민은 눈을 떴다.

1984년 6월 26일 일이 터졌다. 55명의 동독 주민이 상주대표부에 돌입했으며, 그 과정에서 25세의 토마스 티일이 상주대표부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그가 상주대표부에 도착했을 때 출입구는 잠겨 있었고, 그 안에 수십 명의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봤다. 좌절한 티일은 준비한 휘발유를 몸에 끼얹었다. 성냥을 긋는 그의 손이 떨리지만 않았더라면 몸은 불길로 타올랐을 것이다. 그 순간 건물 내 경비원이 달려 나와 거의 실신한 그를 무사히 건물 안으로 끌어들였다.

상주대표부 탈출 드라마의 횃불이었다. 이날 상주대표부는 개설 이후 처음으로 문을 폐쇄했다.


▲ 1984년 6월 자유행 문턱을 넘은 동독 주민 / 사진=rbb

서독은 인도적 측면에서 상주대표부 점거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들 처리는 독-독 관계에 커다란 부담이었다. 동독과 안정적이고 우호적 관계의 구축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점거자들에게 공식적인 여행허가 절차를 밟으라며 떠날 것을 권했으나, 들을 리 만무했다.

동독은 서독의 진입 허용이 주권을 침해하고 압박하는 것이라 비난하며 조속한 퇴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점거 상태가 길어지고, 열악한 거주 환경이 언론을 통해 시간이 갈수록 확대 보도되자 동독 지도부는 마침내 문제 해결을 결정했다.

'자유거래(Freikauf)'였다. 관계 악화를 원하지 않았던 양 독이 조용한 해결 방식을 택한 것이다. 동독은 점거자들이 상주대표부를 나가도 처벌하지 않고, 이들이 서독행 여행허가신청서를 제출하면 시간차를 가지되 모두 서독으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서독은 동독에 그 대가를 지불하되 전 과정을 비공개로 진행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7월 5일 마지막 남은 동독 주민이 대표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여행허가를 신청했다. 8월 말까지 점거자 모두가 서독 땅을 밟을 수 있었다.


▲ 1984년 7월 서독행 자유티켓을 쥐고 대표부를 떠나는 동독 주민 / 사진=ARD

한편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에 의한 상주대표부 점거가 계속되어 양 독 관계의 걸림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방지 대책을 동독과 협의했다. 상주대표부에 두 개의 방이 있고, 그곳에 동독 주민이 들어와서 관심사항을 얘기하는데, 만약 안쪽에서만 문을 열 수 있는 유리문을 통해서만 방에 들어서도록 수리한다면 대량 진입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이었다.

1984년 7월 31일 상주대표부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보안조치가 강화되었다. 계단에 격자가 설치되었고, 그 일부 잔재는 지금도 남아 있다.

동구권 변화의 바람에 따라 동독은 1988년 말 주민의 해외여행허가 관련 법적 조치를 보완했으나, 서독대표부 점거는 멈추지 않았다. 1989년 1월 2일 4명의 동독 주민이 진입해 서독행을 요구했고, 숫자는 곧 20명을 넘었다.

이들에게도 자유거래가 적용되었다. 동독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을 것이며, 서독 여행신청을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보장했다. 1월 11일 점거자들은 대표부를 떠났다.

1989년 2월 16일 동독의 한 가족 4명이 국민차 '트라비(Trabant)'를 타고 상주대표부 마당으로 차단기를 부수면서 돌진했다. 인민경찰이 부상을 입었으며 차는 폐차되었다. 역시 양 독은 협상하여 동독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이 서독에 오도록 했다.

8월 8일 극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131명이 난입한 것이다. 서독대표부는 즉시 문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약 400㎡ 공간에서 131명이 거주하자 위생 환경은 엉망이 되었다.


▲ 1989년 8월 동독 주민으로 가득찬 서독상주대표부 / 사진=BStU, MfS, HAII

동독은 국제법적으로 서독이 동독 주민을 대표하거나 후견할 어떠한 권리가 없다고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불안정했던 당시 동독 국내 정세와 맞물려 처리를 둘러싸고 독-독 간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협상에 시일이 걸리자 수십 명의 동독 주민은 대표부를 떠났다.

마침내 협상이 타결되어 9월 8일 남은 100명의 동독 주민이 대표부를 나섰다. 여행허가를 받지는 못했으나, 동독은 이들의 여행허가신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보장했다.

사태가 끝났으나 서독상주대표부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입이 계속될 것을 우려하여 문은 계속 닫혔다.

다시 연 것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인 11월 10일이었다. 한 달을 농성했던 점거자들은 대표부를 나간 지 두 달 만에 서독이건 어디건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행 통로 상주대표부는 빛을 잃었다.

1984년 이후 상주대표부에 진입한 동독 주민은 1700명에 달했다. 자유거래는 동독이 만성적으로 부족했던 외환을 획득한 또 하나의 창구였다.

통일 하루 전인 1990년 10월 2일 동독과 서독은 각각의 상주대표부를 영원히 폐쇄했다. 현재 구 동독지역 여러 곳에서 '상주대표부(Ständige Vertretung)'란 이름의 식당을 발견할 수 있다.


▲ 식당 이름으로 역사를 이어가는 상주대표부 / 사진=FoodNotify

북한 주민이 북한지역 내 우리 관할 건물에 진입하여 남한행을 요구할 다음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개성 남북연락사무소가 재개되고 북한 주민이 우리 건물에 진입,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등 남북협력사업이 재개되고 북한 주민이 우리 건물에 진입, 향후 서울과 평양에 남북이 각각 상주대표부를 개설하고 북한 주민이 우리 대표부 진입 등.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형 자유거래(K-Freikauf)'의 조용한 추진을 고려할 수 있다. 이들의 인권과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에 입각한 국가적 의무이다. 사람을 거래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으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황에서도 다른 평화적 해결 방안이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비공개로 추진되어야 할 자유거래에서 독일 사례와 같이 대가로 당연히 현금이 아니라 현물을 주어야 한다. 그것도 대북 국제제재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동의할 수 있는 물품으로 지급해야 할 것이다. 한국형 자유거래는 전시 국군포로와 납북자, 전후 억류자 문제의 해결방안으로도 고려할 수 있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 인민을 대가를 받고 거래하는 행위는 정권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사업(Geschäft)'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동독보다 북한은 지금 훨씬 심각한 경제난, 통치자금 고갈에 빠져 있다.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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