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8] "6월 17일 동베를린 인민봉기와 서독의 선택" (매일경제,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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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82회 작성일 21-11-04 15:09본문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8] "6월 17일 동베를린 인민봉기와 서독의 선택" (매일경제, 2021.08.23)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1/08/30686/
1953년 6월 17일, 인민 봉기가 동독에서 일어났다. 전후 급속히 진행된 동구권의 공산화 과정에서 반스탈린, 반공산주의를 외친 최초의 대규모 항쟁이다. 동독 공산 독재 체제에 반대한 이 저항을 사후 '1953년 6월 17일 봉기(Aufstand vom 17. Juni 1953)' '인민 봉기(Volksaufstand)' 혹은 '노동자 봉기(Arbeiteraufstand)'라 한다.
동베를린에서 가장 격렬했던 봉기는 전통적인 산업도시 할레, 마그데부르크,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을 포함해 전역으로 확산됐다. 정치적·경제적 요구와 함께 파업, 데모, 항의의 물결이 거세게 번졌다. 급작스레 진행된 사회주의 건설,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요구에 대한 동독 지도부의 무시, 노동강도 기준의 상향 조정, 동독 공산당의 실책 등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자유선거, 소련군 철수, 발터 울브리히트(국가수반) 퇴진 외에 "우리는 단지 빵만이 아니라 모든 소련군을 쳐 죽이기를 원한다" "우리는 총파업을 요구한다" "동독-소련 우호관계 청산" "우리는 어떠한 공산당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떠한 인민군도 필요하지 않다" "오토 그로테볼(동독 총리) 정부 퇴진" 등이 요구되었다.
참가자 수는 40만~150만명에 달했다. 봉기자들은 동독 전역에서 11곳의 시청, 14곳의 시장실, 8곳의 동독 공산당 간부실을 점거했다. 9개의 감옥, 2개의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지부를 포함해 수많은 경찰서에 진입했다.
동베를린에는 유혈사태가 발생했으며, 라테노프에서는 시위대들이 슈타지 정보원을 살해했다. 인민경찰이 진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자 동독 지도부는 동베를린 소재 소련군 사령부로 피신했다.
소련군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시법(戰時法)에 의거해 동독 정부로부터 행정권을 빼앗아 무자비한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약 2만명의 소련군과 1만5000명의 인민경찰이 동원됐다.
사망자 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50~125명에 달했다. 5명의 보안기관원도 살해됐다. 주동자들은 소련군, 슈타지, 인민경찰에 의해 체포·구금됐으며, 그 수는 최소 1만3000명이었다.
▲ 1953년 6월 17일 인민봉기/사진=AdsD der Friedrich-Ebert-Stiftung
동독 공산당과 국가지도부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상황을 진정시키고 통치력을 회복했다. 당국은 또 다른 봉기를 방지하기 위해 당근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임금을 올렸고, 국영 무역상점은 거의 모든 상품 가격을 10~25% 인하했다. 노동강도 기준을 하향 조정했으며, 중공업과 아울러 식료품공업도 육성하기로 했다.
다른 한편으로 체제 안정과 권력 상실 방지를 위해 주민 통제 조직과 기구를 강화했다. 동독이 무너질 때까지 끊임없이 개선하고 개편했다.
주둔 소련군도 유화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독 주민에게 식량을 제공했고, 소련군 주둔지역 내 공장들을 동독 국가 소유로 전환했다. 동독이 지불하는 소련군 주둔 비용을 동독 국가예산의 5% 이내로 제한했고, 이듬해부터 동독에 대한 모든 전쟁배상금 요구를 중단했다.
동독 인민 봉기는 다른 동구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시인 김춘수의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으로 널리 알려진 헝가리(1956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 명명된 체코슬로바키아(1968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1989년 여름부터 터져나온 동독 내 항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서독은 봉기에 크게 당황했다. 동독의 정치적·경제적 문제는 익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동독 주민이 불만을 그렇게 빨리 대규모 봉기로 표출할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서독은 동독 시가지에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 소련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동독이 소련의 종속국이란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소련 외 어느 국가도 개입할 수 없었다. 서베를린 주둔 미군 역시 전승 4국(미·영·프·소) 간의 협정에 의해 소련군 점령지역인 동베를린에 진입할 수 없었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서독도 어떠한 의미 있는 대응 수단이나 방법이 없었다. 비난 성명 발표, 동베를린 시민에 대한 연대감 표출, 전승 4국에 대한 호소 외에. 모든 독일인에게 무력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6월 19일 서베를린에서 열린 사망자 애도 행사에나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 행진에 함께했다.
서독 언론은 정부가 이 사태에 대응해 '기본법(Grundgesetz)'과 전(全) 독일 '단일대표성주장(Alleinvertretungsanspruch)'에 입각한 전 독일적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기본법에 따르면 동독 주민도 독일 국민으로서 서독 주민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서독은 전 독일과 독일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적 국가였다.
서독은 인민 봉기를 통해 독일 분단의 해소, 독일 통일에 미국과 소련 간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후 서독은 '통합정책(Integrationspolitik)'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동·서독 간의 화해, 유럽대륙에서 동구와 서구 간의 화해, 미·소 간의 화해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전략이다.
서독의 통합정책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현실적으로 적용됐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통합정책', 긴장 완화 시기에는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동방통합정책'을 펼쳤다. 신냉전 시기에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통합정책으로 회귀하되, 미국의 양해로 1975년 출범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현 유럽안보협력기구 OSCE)'를 무대로 동독 및 동구권과 제한적이나마 접촉을 지속하는 '균형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동구권에 몰아닥친 변화의 시기에, 미국과 소련을 설득해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물론 서독 외교정책의 기반에는 굳건한 서독·미국 동맹협력 관계가 놓여 있었다.
봉기 이듬해인 1954년부터 서독은 6월 17일을 '독일 통일의 날(Tag der deutschen Einheit)'로 명명하고 국가기념일로 정했다. 1990년 통일이 될 때까지 추념식을 가졌으며, 지금도 그렇다. 다만 '독일 통일의 날'은 통일이 된 10월 3일로 바뀌었다.
▲ 통일독일이 6월 17일 봉기 50주년에 발행한 초일봉피(初日封皮) / 사진=손기웅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을 관통하는 대로가 베를린 중심 거리다. 개선문 서쪽 길인 베를린 거리와 샬로텐부르크 도로를 서베를린 상원은 봉기 5일 뒤 '6월 17일 거리(Straße des 17. Juni)'로 명명했다. 개선문 동쪽 동베를린 길은 '보리수 아래 거리(Unter den Linden)'다.
서독은 1989년 개선문 앞에 동쪽을 바라보는 소녀상을 세웠다. '외치는 사람(der Rufer)'이다. 동상을 돌아가며 "나는 전 세계를 돌며 외친다. 평화, 평화, 평화"라는 글을 새겼다. 몇 달 후 통한의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 6월 17일 거리에 세워진 평화 소녀상, 건너편이 통일 전 동베를린/사진=Barbara Klemm
향후 만약 북한에서 유사 사태가 발생할 경우 북한의 요청에 의해 혹은 북한의 요청을 빙자해 외국, 특히 중국이 무력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상황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68년 전 동베를린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1/08/30686/
1953년 6월 17일, 인민 봉기가 동독에서 일어났다. 전후 급속히 진행된 동구권의 공산화 과정에서 반스탈린, 반공산주의를 외친 최초의 대규모 항쟁이다. 동독 공산 독재 체제에 반대한 이 저항을 사후 '1953년 6월 17일 봉기(Aufstand vom 17. Juni 1953)' '인민 봉기(Volksaufstand)' 혹은 '노동자 봉기(Arbeiteraufstand)'라 한다.
동베를린에서 가장 격렬했던 봉기는 전통적인 산업도시 할레, 마그데부르크,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을 포함해 전역으로 확산됐다. 정치적·경제적 요구와 함께 파업, 데모, 항의의 물결이 거세게 번졌다. 급작스레 진행된 사회주의 건설,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요구에 대한 동독 지도부의 무시, 노동강도 기준의 상향 조정, 동독 공산당의 실책 등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자유선거, 소련군 철수, 발터 울브리히트(국가수반) 퇴진 외에 "우리는 단지 빵만이 아니라 모든 소련군을 쳐 죽이기를 원한다" "우리는 총파업을 요구한다" "동독-소련 우호관계 청산" "우리는 어떠한 공산당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떠한 인민군도 필요하지 않다" "오토 그로테볼(동독 총리) 정부 퇴진" 등이 요구되었다.
참가자 수는 40만~150만명에 달했다. 봉기자들은 동독 전역에서 11곳의 시청, 14곳의 시장실, 8곳의 동독 공산당 간부실을 점거했다. 9개의 감옥, 2개의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지부를 포함해 수많은 경찰서에 진입했다.
동베를린에는 유혈사태가 발생했으며, 라테노프에서는 시위대들이 슈타지 정보원을 살해했다. 인민경찰이 진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자 동독 지도부는 동베를린 소재 소련군 사령부로 피신했다.
소련군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시법(戰時法)에 의거해 동독 정부로부터 행정권을 빼앗아 무자비한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약 2만명의 소련군과 1만5000명의 인민경찰이 동원됐다.
사망자 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50~125명에 달했다. 5명의 보안기관원도 살해됐다. 주동자들은 소련군, 슈타지, 인민경찰에 의해 체포·구금됐으며, 그 수는 최소 1만3000명이었다.
▲ 1953년 6월 17일 인민봉기/사진=AdsD der Friedrich-Ebert-Stiftung
동독 공산당과 국가지도부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상황을 진정시키고 통치력을 회복했다. 당국은 또 다른 봉기를 방지하기 위해 당근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임금을 올렸고, 국영 무역상점은 거의 모든 상품 가격을 10~25% 인하했다. 노동강도 기준을 하향 조정했으며, 중공업과 아울러 식료품공업도 육성하기로 했다.
다른 한편으로 체제 안정과 권력 상실 방지를 위해 주민 통제 조직과 기구를 강화했다. 동독이 무너질 때까지 끊임없이 개선하고 개편했다.
주둔 소련군도 유화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독 주민에게 식량을 제공했고, 소련군 주둔지역 내 공장들을 동독 국가 소유로 전환했다. 동독이 지불하는 소련군 주둔 비용을 동독 국가예산의 5% 이내로 제한했고, 이듬해부터 동독에 대한 모든 전쟁배상금 요구를 중단했다.
동독 인민 봉기는 다른 동구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시인 김춘수의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으로 널리 알려진 헝가리(1956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 명명된 체코슬로바키아(1968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1989년 여름부터 터져나온 동독 내 항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서독은 봉기에 크게 당황했다. 동독의 정치적·경제적 문제는 익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동독 주민이 불만을 그렇게 빨리 대규모 봉기로 표출할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서독은 동독 시가지에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 소련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동독이 소련의 종속국이란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소련 외 어느 국가도 개입할 수 없었다. 서베를린 주둔 미군 역시 전승 4국(미·영·프·소) 간의 협정에 의해 소련군 점령지역인 동베를린에 진입할 수 없었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서독도 어떠한 의미 있는 대응 수단이나 방법이 없었다. 비난 성명 발표, 동베를린 시민에 대한 연대감 표출, 전승 4국에 대한 호소 외에. 모든 독일인에게 무력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6월 19일 서베를린에서 열린 사망자 애도 행사에나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 행진에 함께했다.
서독 언론은 정부가 이 사태에 대응해 '기본법(Grundgesetz)'과 전(全) 독일 '단일대표성주장(Alleinvertretungsanspruch)'에 입각한 전 독일적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기본법에 따르면 동독 주민도 독일 국민으로서 서독 주민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서독은 전 독일과 독일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적 국가였다.
서독은 인민 봉기를 통해 독일 분단의 해소, 독일 통일에 미국과 소련 간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후 서독은 '통합정책(Integrationspolitik)'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동·서독 간의 화해, 유럽대륙에서 동구와 서구 간의 화해, 미·소 간의 화해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전략이다.
서독의 통합정책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현실적으로 적용됐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통합정책', 긴장 완화 시기에는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동방통합정책'을 펼쳤다. 신냉전 시기에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통합정책으로 회귀하되, 미국의 양해로 1975년 출범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현 유럽안보협력기구 OSCE)'를 무대로 동독 및 동구권과 제한적이나마 접촉을 지속하는 '균형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동구권에 몰아닥친 변화의 시기에, 미국과 소련을 설득해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물론 서독 외교정책의 기반에는 굳건한 서독·미국 동맹협력 관계가 놓여 있었다.
봉기 이듬해인 1954년부터 서독은 6월 17일을 '독일 통일의 날(Tag der deutschen Einheit)'로 명명하고 국가기념일로 정했다. 1990년 통일이 될 때까지 추념식을 가졌으며, 지금도 그렇다. 다만 '독일 통일의 날'은 통일이 된 10월 3일로 바뀌었다.
▲ 통일독일이 6월 17일 봉기 50주년에 발행한 초일봉피(初日封皮) / 사진=손기웅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을 관통하는 대로가 베를린 중심 거리다. 개선문 서쪽 길인 베를린 거리와 샬로텐부르크 도로를 서베를린 상원은 봉기 5일 뒤 '6월 17일 거리(Straße des 17. Juni)'로 명명했다. 개선문 동쪽 동베를린 길은 '보리수 아래 거리(Unter den Linden)'다.
서독은 1989년 개선문 앞에 동쪽을 바라보는 소녀상을 세웠다. '외치는 사람(der Rufer)'이다. 동상을 돌아가며 "나는 전 세계를 돌며 외친다. 평화, 평화, 평화"라는 글을 새겼다. 몇 달 후 통한의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 6월 17일 거리에 세워진 평화 소녀상, 건너편이 통일 전 동베를린/사진=Barbara Klemm
향후 만약 북한에서 유사 사태가 발생할 경우 북한의 요청에 의해 혹은 북한의 요청을 빙자해 외국, 특히 중국이 무력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상황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68년 전 동베를린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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