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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6] "베를린 하늘다리 (상)" (매일경제, 20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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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21회 작성일 21-08-1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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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6] "베를린 하늘다리 (상)" (매일경제, 2021.08.09)


 '베를린 하늘다리 기념비(Berliner Luftbrückendenkmal)', 자유 베를린의 상징으로 템펠호프공항 앞에 서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리는 자유에 감사하며, 그 자유를 지켜준 선열과 우방국에 감사하며, 1948년의 독일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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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하늘다리 기념비와 템펠호프공항

전쟁은 끝났지만, 서베를린에는 끝나지 않았다. 전승국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는 독일을 동서로 찢었고, 동쪽 내륙 깊숙이 위치한 베를린도 동서로 갈랐다. 서쪽 지역(1949년 이후 서독)과 마찬가지로 서베를린도 서방연합 3국(미·영·프)이 점령·관리하는 가운데 서베를린 시민은 '불안한 자유'의 하루하루를 맞아야 했다.

소련에 서베를린과 주둔 연합군은 눈엣가시였다. 서울을 동서로 나누고 서쪽을 소련군과 중공군이 통치한다면 우리가 가질 감정으로 비유될 수 있다. 자신의 점령지 한복판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모든 것을 감시하고 군수물자가 오가고, 동서남북으로 자유와 자본주의를 선전하는 상황을 소련은 견딜 수 없었다. 기회를 노렸다.

소련군정위는 1948년 1월부터 전승 4국 간 합의에 반하여 서쪽으로부터 서베를린으로 들어오는 민간인과 물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연합군에 대해서도 단속(斷續)적으로 통제했다. 4월 1일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다리를 잠시 봉쇄했을 때 긴장이 고조되었다. 미군과 영국군은 이틀 동안 서베를린 주둔군에 대한 군수물자를 비행기로 공수했다. 하늘다리의 예행연습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총선을 실시해 단일정부를 구성하자는 연합국의 제안을 소련이 거부하고 점령지를 닫아걸자, 연합국은 6월 20일 서쪽 지역에 대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명분을 잡은 소련은 전격전(電擊戰)으로 베를린 봉쇄를 시작했다.

24일 새벽,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공급되던 전기를 차단하고, 오전 6시를 기해 서쪽으로부터 서베를린으로 연결되는 모든 도로, 철도, 수로를 막았다. 소련 점령지나 동베를린으로부터 서베를린에 대한 어떠한 물자 공급의 중단도 공표했다. 서베를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2년 뒤 한반도에서 터진 상황과 같다. 총선을 통한 단일정부 구성을 거부하고, 침공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마친 뒤 탐색전을 벌이다 새벽에 전격적인 작전 개시다. 소련의 세력권 확장이란 목적도 같다.

당시 서베를린 인구는 2만여 명의 연합군과 군속을 포함해 약 220만명에 달했다. 모든 생필품은 시 외부로부터 조달해야 했고, 약 75%를 서쪽 지역에서 수입하던 상황이었다.

봉쇄 당시 생필품의 재고는 한 달 분량으로, 이것도 특별배급제 시행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특히 다가올 겨울이 걱정이었다. 석탄 공급이 중단되면 도시, 공원, 가정집 마당의 나무를 베어 땔 상황이었다. 연합군은 화폐개혁에 따른 소련의 반발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서베를린 완전 봉쇄는 계산하지 못했다.

미군정사령관 루셔스 클레이는 결단력 있는 무장(武將)이었다. 전 독일총선을 소련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서베를린을 포기하자는 영군정사령관의 제안을 거부하고, 단호하게 서베를린 공수를 결정했다.

예행연습한 하늘다리를 확장해 서베를린 시민 대상 물자 공수 가능성을 확인한 클레이는 서베를린 시장 에른스트 로이터에게 공수되는 제한적인 물자로도 서베를린 시민이 인내할 수 있을지 여부를 타진했다. 빌리 브란트를 대동한 로이터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베를린 시민은 어떠한 희생도 감내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결연히 답했다.

클레이는 봉쇄 시작 당일인 6월 24일 '베를린 하늘다리(Berliner Luftbrücke)' 건설을 명령했다. 훗날 로이터는 당시 클레이의 단호한 결정에 놀랐다고, 그렇지만 공수를 통한 생존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연합군은 당시 서베를린과 3개의 연결 항로, 즉 북쪽의 함부르크-뤼베크 항로, 중부의 하노버-첼레 항로, 남쪽의 프랑크푸르트-비스바덴 항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6월 26일 첫 미군 수송기가 프랑크푸르트 항로를 통해 서베를린의 템펠호프공항으로 발진했다. 영국군도 하노버 항로를 통해 공수에 가담했고, 수상비행기도 활용해 서베를린의 하벨강 지류와 반호수로 향했다. 공수에는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도 동참했다.

초기에 1일 750t의 물자가 공수됐으나 태부족이었다. 여름에 서베를린이 필요한 최소 수요가 하루 4500t, 겨울에는 하루 1만t으로 평가된 상황이었다.

7월 연합군이 실시한 서베를린 시민 대상 여론조사에서 86%가 공수로는 겨울을 날 수 없을 것이며, 결국 소련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응답했다. 당시 서베를린자치의장 오토 주어조차 결국 연합군이 서베를린을 포기하고 떠날 것이라 예상했다.

연합군은 공수의 인적, 물적, 행정적 최적 정비에 착수했다. 우선 7월 들어 통합공수사령부를 운영하기로 하고, 미군의 윌리엄 터너가 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 7월 말에는 2000t으로 끌어올렸다. 그중 3분의 2가 석탄이었다.

수송기도 문제였다. 급작스러운 공수작전에 의해 미군은 물론이고 특히 영국군은 다양한 기종을 징발했다. 이륙과 착륙에 필요한 활주로 길이가 다르고, 사용 연료에도 차이가 있고, 물자의 상·하역 방법과 소요 시간도 다르고, 정비와 부속품 조달이 매우 복잡했다. 최대한의 기종 단일화 조치가 필요했다.

항로 이용 방법도 변화가 필요했다. 항로마다 비행기가 오고 가며 엉켜 충돌의 위험도 있었지만 통제에 따른 시간 손실이 컸다. 해결 방법은 일방통행이었다. 북쪽과 남쪽의 함부르크항로와 프랑크푸르트항로는 서베를린행 전용 통로로, 중부의 하노버항로는 귀환편 전용 통로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하늘에 일방통행 고속도로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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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고속도로가 된 3개 항로 / 사진=손기웅

비행 방법도 개편돼야 했다. 수송기는 3분 간격으로 착륙이 계획됐다. 8월 13일 터너 사령관이 상공에서 지휘하는 가운데 수송기들은 베를린의 악천후로 템펠호프공항에 제때에 착륙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극심한 정체를 겪었다. 결국 터너 아래로 3대의 수송기가 착륙 중 충돌하였고, 한 대는 화염에 싸였다.

개편안은 첫째, 착륙에 실패한 수송기는 재착륙 시도가 아니라 즉시 회항해 다시 순서에 따라 이륙하도록 했다. 둘째는 5중 비행이었다. 수송기를 3분 간격과 5중 고저로 비행하게 체계화해 충돌을 예방하고 시간을 단축하게 하였다. 셋째, 착륙 후 이륙에 소요되는 시간을 75분에서 30분으로 단축하도록 하역 과정을 재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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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간격 5중 비행의 공수작전 / 사진=손기웅

넷째, 새로운 공항 건설이었다. 프랑스 점령지 내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테겔공항이 선택되었다. 연인원 1만9000명, 태반이 여성인 근로자가 불철주야 작업해 90일 만에 2400m 길이의, 당시 유럽 최장의 활주로는 물론이고 부속 건물과 시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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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오는 수송기를 기다리는 서베를린 아이들 / 사진=Henry Ries

한 달 만인 8월 말 서베를린 생존에 필요한 최소량 4500t이 공수되었다. 서베를린 시민은 극도의 내핍(耐乏)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전 세계에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서베를린을 버리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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