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문]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개인 보좌관 귄터 귀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요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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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13회 작성일 21-11-04 16:31본문
[손기웅의 통일문]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개인 보좌관 귄터 귀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요원" (2021.10.12)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3109
남파 간첩들이 청와대 주변에서 5~6년간 암약한 뒤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고위층 탈북자의 증언이 나왔다. 물론 확인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요 기관뿐 아니라 각계 사회단체에 간첩들이나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 침투해있을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이다. 최근 ‘청주 간첩단 사건’은 발각된 한 사례일지 모른다.
<사진>
남파 간첩의 청와대 근무를 주장한 탈북자 김국성씨 / BBC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남북관계, 50배나 넘은 현격한 국력 차이, 미·중 간 새 판 짜기 힘겨루기 속에 놓인 남과 북, 이 현실에서 김정은이 가장 긴급하고 중요하게 매달릴 곳이 어디 일까. 우리의 정책 결정 과정에 눈과 귀를 들이대려는 것이 아닐까. ‘북한의 대변인’이라 외국으로부터 비판받는 문 정부 최고정책결정권자들 틈속에 북한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 과연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본 코너에 ‘북한과 연결선을 가진 어둠의 세력이 권력 최정상에 얼씬거리지 않을까’(2021년 5월 26일)로 소개되었지만, 다시 한 번 분단 시기 독일에서 벌어졌던 가장 충격적인 간첩 사건을 자세하게 짚어 보고자 한다.
<사진>
브란트의 1969년 수상 취임과 1974년 귀욤 사건으로 퇴진을 보도한 서독 시사주간지 ‘슈피겔’ / 필자제공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으로 동독 및 사회주의권과 관계를 개선했던,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정치인,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개인 보좌관 귄터 귀욤이 동독 비밀경찰 국가안보성 ‘슈타지(Stasi)’의 요원으로 발각되었다.
귀욤은 히틀러의 제3 제국 시기에 나치당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에 그의 모험심과 정치적 신념이 더해져 동독의 간첩이 되었다. 당시 나치 전력(前歷)을 지닌 다수가 동독 슈타지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동베를린 소재 출판사 ‘인민과 지식(Volk und Wissen)’의 편집 및 사진기자로 활동하다, 1954년에 서독으로 잠입했다.
슈타지 산하 ‘첩보부(Hauptverwaltung Aufklärung)’의 수장 마르쿠스 볼프는 그에게 암호명 ‘한센’을 부여하고, 첩보부의 ‘위장요원(Inoffizieller Mitarbeiter)’으로 활동하게 했다. 귀욤의 부인 크리스텔 역시 1958년 ‘하인쩨’란 가명으로 간첩 요원이 되었다.
귀욤 부부의 서독 정착은 네덜란드 국적인 귀욤의 장모를 이용했다. 먼저 장모가 서독의 프랑크푸르트로 거주지를 옮기도록 한 후, 귀욤 부부는 자유를 찾아 서독의 장모에게 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동독을 탈출했다. 일반적으로 동독탈출자가 거쳐야 하는 서독 임시수용소에서의 비밀 심문을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귀욤은 동독 첩보부로부터 받은 활동자금 1만DM을 사용하여 서독에서 커피·담배 가게를 운영했고, 부인은 비서직을 얻었다. 그들은 동독의 단파방송을 통해 슈타지의 지령으로 당시 야당이던 진보정당 사민당(SPD) 침투를 명령받았다.
귀욤은 1962년 사민당의 남헤센 지역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의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사민당 구역사무총장, 1968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시당사무총장과 인연을 맺었고, 서독 연방의원으로 훗날 교통부장관, 체신부장관 및 국방부장관이 된 게오르그 레버의 선거책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크리스텔은 1959년부터 사민당 남헤센 지역당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연방의원 빌헤름 비르켄바하를 도울 기회를 가졌다. 1964년 비르켄바하가 헤센 주정부를 관장하게 되었을 때, 크리스텔은 그의 두 번째 문고리 비서역을 맡아 주요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크리스텔이 중요 문서를 집에 가져오면 귀욤이 사진을 찍어 슈타지에 전달했다.
귀욤은 아내를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프리츠’와 ‘막스’로 명명한 두 명의 서독 사민당 거물 정치인과 접촉하여 슈타지가 흥분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귀욤은 마이크로필름화된 정보를 시가통에 담아 ‘하인쯔’라는 접촉요원을 통해 동베를린으로 전달했다.
귀욤은 첩보부 수장 볼프도 개별적으로 만났고, 1964년 말 볼프는 귀욤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사민당의 정치인을 도와주면서 접근할 것을 지시했다. 향후 서독 정부가 보수당인 기민당(CDU)에서 사민당으로 바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귀욤은 1969년 여름 사민당 소속 교통부장관 레버의 선거를 성공적으로 지원하였고, 10월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하자 레버를 통해 수도 본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란트가 수상으로 선출되자 레버의 추천으로 마침내 수상청에 입성할 수 있었다. 곧 아내도 본 주재 헤센주 대표부로 옮겨왔다. 암약 15년만의 쾌거였다.
귀욤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열성과 헌신으로 빠르게 수상청에 자리를 잡아 노조담당 책임자로 승진하였고, 여직원들에게 접근하여 호감을 얻었다. 그중 하나가 브란트의 고문이면서 ‘신동방정책’과 ‘독일정책(Deutschlandspolitik)’을 설계하고 자문했던 에곤 바의 여비서였다. 당시 서독이 ‘기본조약’ 체결을 두고 동독과 협상을 하던 시기에 귀욤은 여비서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서 기밀에 접근했다. 귀욤의 방이 수상실에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브란트의 대화도 도청했다.
귀욤은 서독 정부 내 최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간첩 총책 볼프에 의하면, 1970년 브란트와 동독 총리 빌리 슈토페 간 사상 최초의 독-독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독 정부가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동독이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는데 귀욤이 기여했다고 한다.
1970년 브란트가 1차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의 에어푸르트를 방문할 때, 귀욤은 브란트에게 나치가 운영했던 강제수용소 부헨발트도 방문할 것을 권했고 실제 이루어졌다. 브란트가 강제수용소를 방문하여 헌화하는 의식을 동독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브란트를 들러리로 하여 동독의 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장엄하게 조화를 옮기는 동독 인민군을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보여주면서, 동독을 서독과는 별개의 주권적 독립국가로 선전할 수 있었다.
<사진>
부헨발트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헌화하는 브란트 / 사진=BStU & MfS
귀욤은 1970년 자르브뤼켄에서 열렸던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수상청과의 연락관 역할을 하며, 정부의 기밀문서에 공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곧 그는 ‘엄격한 비밀’로 분류된 문서를 관리할 권한을 가졌다.
더욱 중요한 돌파구는 브란트의 두 번째 수상 임기를 위해 중요했던 1972년의 선거 운동에서 귀욤이 자신을 브란트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만들었던 때였다. 귀욤은 수상의 연설과 행사를 세심하게 준비했고, 브란트가 이동 중에 처리해야 할 정부 문서가 가득 찬 가방을 들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동독과의 ‘기본조약’ 체결을 앞두고 최종적 조율단계에 있었던 에곤 바가 브란트에게 보낸 2장의 서신을 그는 손에 쥘 수 있었다.
브란트의 선거 승리 후 1972년 11월 그는 수상청의 세 보좌실 가운데 하나를 이끌도록 요청받았다. 이제 귀욤은 연방수상과 집권여당인 사민당 및 연방의회와의 협력을 책임지는 보좌관으로서 수상의 바로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수상청 부서장 회의, 당 최고회의 등 중요 회의에 참여했고, 필요한 서류를 항상 손에 쥘 수 있었다.
귀욤은 그의 전임자로부터 서독 요원의 동독 내 침투에 관한 비밀보고서도 넘겨받았다. 그의 아내 역시 선거 후 서독 국방부장관이 된 레버의 비서가 되었다.
귀욤에게 최고의 순간은 1973년 6월 브란트가 노르웨이 가족 휴가에 동행을 제안했을 때였다. 이 기간 수상의 모든 서신이 그의 손을 거쳤다. ‘비밀’ 혹은 ‘1급 비밀’로 분류된 서신들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당시 미대통령 닉슨의 친서도 있었다. 귀욤은 이들 기밀문서를 비밀리에 슈타지 요원들이 촬영하도록 했다.
<사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 1989년 11월10일 브란데부르크 개선문 앞에 선 브란트 / William Palmer Mikkelsen
동독은 귀욤을 통해 브란트의 생각, 서독 정부와 사민당 내의 정황을 서독 장관이나 사민당 최고위원보다 더 빨리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관의 임면, 부처 내 주요 인사이동을 장관들보다 먼저 파악하고, 동독에 전달하여 서독 정부 내에 침투시킨 간첩들을 시의적절하게 재배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독 내 활동 중인 서독 요원들을 붕괴시키거나 역공작을 펼치게 하였다. 크리스텔은 NATO의 전략 등 기밀을 동독에 전달했다.
1974년 4월 24일 귀욤이 체포되었다. 브란트는 사건 발생 2주 후인 1974년 5월 7일 수상직을 떠났다.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베를린장벽 건설 등 분단의 질곡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체험했고, 누구보다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변화를 추진했고, 성과를 거두었던 브란트는 1972년 체결된 ‘기본조약’에 입각하여 서독의 본과 동독의 동베를린에 각각의 상주대표부가 문을 연 5일 후 퇴진해야만 했다.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3109
남파 간첩들이 청와대 주변에서 5~6년간 암약한 뒤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고위층 탈북자의 증언이 나왔다. 물론 확인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요 기관뿐 아니라 각계 사회단체에 간첩들이나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 침투해있을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이다. 최근 ‘청주 간첩단 사건’은 발각된 한 사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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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 간첩의 청와대 근무를 주장한 탈북자 김국성씨 / BBC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남북관계, 50배나 넘은 현격한 국력 차이, 미·중 간 새 판 짜기 힘겨루기 속에 놓인 남과 북, 이 현실에서 김정은이 가장 긴급하고 중요하게 매달릴 곳이 어디 일까. 우리의 정책 결정 과정에 눈과 귀를 들이대려는 것이 아닐까. ‘북한의 대변인’이라 외국으로부터 비판받는 문 정부 최고정책결정권자들 틈속에 북한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 과연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본 코너에 ‘북한과 연결선을 가진 어둠의 세력이 권력 최정상에 얼씬거리지 않을까’(2021년 5월 26일)로 소개되었지만, 다시 한 번 분단 시기 독일에서 벌어졌던 가장 충격적인 간첩 사건을 자세하게 짚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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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트의 1969년 수상 취임과 1974년 귀욤 사건으로 퇴진을 보도한 서독 시사주간지 ‘슈피겔’ / 필자제공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으로 동독 및 사회주의권과 관계를 개선했던,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정치인,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개인 보좌관 귄터 귀욤이 동독 비밀경찰 국가안보성 ‘슈타지(Stasi)’의 요원으로 발각되었다.
귀욤은 히틀러의 제3 제국 시기에 나치당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에 그의 모험심과 정치적 신념이 더해져 동독의 간첩이 되었다. 당시 나치 전력(前歷)을 지닌 다수가 동독 슈타지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동베를린 소재 출판사 ‘인민과 지식(Volk und Wissen)’의 편집 및 사진기자로 활동하다, 1954년에 서독으로 잠입했다.
슈타지 산하 ‘첩보부(Hauptverwaltung Aufklärung)’의 수장 마르쿠스 볼프는 그에게 암호명 ‘한센’을 부여하고, 첩보부의 ‘위장요원(Inoffizieller Mitarbeiter)’으로 활동하게 했다. 귀욤의 부인 크리스텔 역시 1958년 ‘하인쩨’란 가명으로 간첩 요원이 되었다.
귀욤 부부의 서독 정착은 네덜란드 국적인 귀욤의 장모를 이용했다. 먼저 장모가 서독의 프랑크푸르트로 거주지를 옮기도록 한 후, 귀욤 부부는 자유를 찾아 서독의 장모에게 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동독을 탈출했다. 일반적으로 동독탈출자가 거쳐야 하는 서독 임시수용소에서의 비밀 심문을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귀욤은 동독 첩보부로부터 받은 활동자금 1만DM을 사용하여 서독에서 커피·담배 가게를 운영했고, 부인은 비서직을 얻었다. 그들은 동독의 단파방송을 통해 슈타지의 지령으로 당시 야당이던 진보정당 사민당(SPD) 침투를 명령받았다.
귀욤은 1962년 사민당의 남헤센 지역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의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사민당 구역사무총장, 1968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시당사무총장과 인연을 맺었고, 서독 연방의원으로 훗날 교통부장관, 체신부장관 및 국방부장관이 된 게오르그 레버의 선거책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크리스텔은 1959년부터 사민당 남헤센 지역당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연방의원 빌헤름 비르켄바하를 도울 기회를 가졌다. 1964년 비르켄바하가 헤센 주정부를 관장하게 되었을 때, 크리스텔은 그의 두 번째 문고리 비서역을 맡아 주요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크리스텔이 중요 문서를 집에 가져오면 귀욤이 사진을 찍어 슈타지에 전달했다.
귀욤은 아내를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프리츠’와 ‘막스’로 명명한 두 명의 서독 사민당 거물 정치인과 접촉하여 슈타지가 흥분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귀욤은 마이크로필름화된 정보를 시가통에 담아 ‘하인쯔’라는 접촉요원을 통해 동베를린으로 전달했다.
귀욤은 첩보부 수장 볼프도 개별적으로 만났고, 1964년 말 볼프는 귀욤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사민당의 정치인을 도와주면서 접근할 것을 지시했다. 향후 서독 정부가 보수당인 기민당(CDU)에서 사민당으로 바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귀욤은 1969년 여름 사민당 소속 교통부장관 레버의 선거를 성공적으로 지원하였고, 10월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하자 레버를 통해 수도 본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란트가 수상으로 선출되자 레버의 추천으로 마침내 수상청에 입성할 수 있었다. 곧 아내도 본 주재 헤센주 대표부로 옮겨왔다. 암약 15년만의 쾌거였다.
귀욤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열성과 헌신으로 빠르게 수상청에 자리를 잡아 노조담당 책임자로 승진하였고, 여직원들에게 접근하여 호감을 얻었다. 그중 하나가 브란트의 고문이면서 ‘신동방정책’과 ‘독일정책(Deutschlandspolitik)’을 설계하고 자문했던 에곤 바의 여비서였다. 당시 서독이 ‘기본조약’ 체결을 두고 동독과 협상을 하던 시기에 귀욤은 여비서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서 기밀에 접근했다. 귀욤의 방이 수상실에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브란트의 대화도 도청했다.
귀욤은 서독 정부 내 최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간첩 총책 볼프에 의하면, 1970년 브란트와 동독 총리 빌리 슈토페 간 사상 최초의 독-독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독 정부가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동독이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는데 귀욤이 기여했다고 한다.
1970년 브란트가 1차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의 에어푸르트를 방문할 때, 귀욤은 브란트에게 나치가 운영했던 강제수용소 부헨발트도 방문할 것을 권했고 실제 이루어졌다. 브란트가 강제수용소를 방문하여 헌화하는 의식을 동독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브란트를 들러리로 하여 동독의 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장엄하게 조화를 옮기는 동독 인민군을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보여주면서, 동독을 서독과는 별개의 주권적 독립국가로 선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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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헨발트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헌화하는 브란트 / 사진=BStU & MfS
귀욤은 1970년 자르브뤼켄에서 열렸던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수상청과의 연락관 역할을 하며, 정부의 기밀문서에 공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곧 그는 ‘엄격한 비밀’로 분류된 문서를 관리할 권한을 가졌다.
더욱 중요한 돌파구는 브란트의 두 번째 수상 임기를 위해 중요했던 1972년의 선거 운동에서 귀욤이 자신을 브란트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만들었던 때였다. 귀욤은 수상의 연설과 행사를 세심하게 준비했고, 브란트가 이동 중에 처리해야 할 정부 문서가 가득 찬 가방을 들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동독과의 ‘기본조약’ 체결을 앞두고 최종적 조율단계에 있었던 에곤 바가 브란트에게 보낸 2장의 서신을 그는 손에 쥘 수 있었다.
브란트의 선거 승리 후 1972년 11월 그는 수상청의 세 보좌실 가운데 하나를 이끌도록 요청받았다. 이제 귀욤은 연방수상과 집권여당인 사민당 및 연방의회와의 협력을 책임지는 보좌관으로서 수상의 바로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수상청 부서장 회의, 당 최고회의 등 중요 회의에 참여했고, 필요한 서류를 항상 손에 쥘 수 있었다.
귀욤은 그의 전임자로부터 서독 요원의 동독 내 침투에 관한 비밀보고서도 넘겨받았다. 그의 아내 역시 선거 후 서독 국방부장관이 된 레버의 비서가 되었다.
귀욤에게 최고의 순간은 1973년 6월 브란트가 노르웨이 가족 휴가에 동행을 제안했을 때였다. 이 기간 수상의 모든 서신이 그의 손을 거쳤다. ‘비밀’ 혹은 ‘1급 비밀’로 분류된 서신들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당시 미대통령 닉슨의 친서도 있었다. 귀욤은 이들 기밀문서를 비밀리에 슈타지 요원들이 촬영하도록 했다.
<사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 1989년 11월10일 브란데부르크 개선문 앞에 선 브란트 / William Palmer Mikkelsen
동독은 귀욤을 통해 브란트의 생각, 서독 정부와 사민당 내의 정황을 서독 장관이나 사민당 최고위원보다 더 빨리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관의 임면, 부처 내 주요 인사이동을 장관들보다 먼저 파악하고, 동독에 전달하여 서독 정부 내에 침투시킨 간첩들을 시의적절하게 재배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독 내 활동 중인 서독 요원들을 붕괴시키거나 역공작을 펼치게 하였다. 크리스텔은 NATO의 전략 등 기밀을 동독에 전달했다.
1974년 4월 24일 귀욤이 체포되었다. 브란트는 사건 발생 2주 후인 1974년 5월 7일 수상직을 떠났다.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베를린장벽 건설 등 분단의 질곡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체험했고, 누구보다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변화를 추진했고, 성과를 거두었던 브란트는 1972년 체결된 ‘기본조약’에 입각하여 서독의 본과 동독의 동베를린에 각각의 상주대표부가 문을 연 5일 후 퇴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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