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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문] "김정은이 김정일 사망 10주기 맞아 평양시민에게 물고기를 선물한 까닭" (최보식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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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20회 작성일 22-02-0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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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문] "김정은이 김정일 사망 10주기 맞아 평양시민에게 물고기를 선물한 까닭" (최보식의 언론: 2021.12.23)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4608

김정은 총비서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평양시민에게 물고기 선물을 베풀었다. 불편한 몸이었던 김정일이 사망 전날인 2011년 12월 16일 늦은 밤까지 평양시민에게 물고기 공급을 준비했고, 이를 위한 현지 시찰 차 야간열차에 탑승했다 사망한 것으로 선전해 온 북한이다.

조선중앙통신은 “평양시민들이 받아 안은 이 사랑에는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도 수도시민들의 물고기 공급과 관련하여 가슴 뜨거운 조치를 취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이 그대로 인민들에게 가닿도록 해주신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위민헌신의 세계가 그대로 비껴있다”며, 대를 이어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부자상(父子象)을 각인하고 있다.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경제난과 대북 제재, 자연 재해와 전염병 속에서 물고기 선물을 받아 안고 황송히 기뻐하는 평양시민이 보인다. 없는 기름과 운송수단에 끝없이 이어졌을 수송차량과 조직자들의 헐떡이는 숨소리, 그냥 쳐다봐야만 했을 평양 밖 주민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먹자고 사는 것이다. 배고픔 앞에 장사 없다. 상대적 빈곤의 현실이 이념과 체제를 바꾸는 원동력이다. 동독이 그랬다.

커피는 동독인의 일상에서 뗄 수 없는 기호품이었다. 외화 부족에 시달렸던 동독이 넉넉한 양의 커피를 수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민들은 옥수수 같은 곡물이나 식물로 만든 이른바 ‘대용커피(Ersatzkaffee)’를 마셔야 했고, 상점에서 커피를 구하기란 가뭄에 콩 나기였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느냐가 삶의 수준이 되었다.

서독의 친지나 지인이 우편으로 보내주거나, 동독 방문 시에 가져오는 커피가 숨통을 틔어주었다. 평생을 두고 결코 체험할 수 없었던 진한 향기의 맛은 물론이고, 동독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품격 있고 멋있는 포장으로부터 서독에 동경심을 가졌다.

동독 공산당 핵심 과제 중의 하나가 커피 수급이었다. 1977년 7월 당서기장 호네커는 커피원두의 수입을 제한하는 대신 ‘믹스커피(Kaffee Mix)’를 권장하는 당 결정을 공표하였다. 주민은 외면했고, 진짜 커피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졌다. 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자 호네커는 이듬해 철회했다.

방법은 물물교환이었다. 에티오피아에 철모와 탄약을 제공하는 대가로 원두를 받았다. 커피보다 차 생산이 많았던 베트남에게 차량과 장비를 제공하고 베트남에 대규모 커피농장을 건설하도록 했다. 베트남이 세계적인 커피수출국으로 가는 출발이었다.

<사진> 동독의 대용커피(왼쪽)와 믹스커피 / 필자제공

남쪽의 열대과일 역시 절대 부족이었다. 특히 동독인은 바나나를 선호했고, 바나나를 먹는다는 것이 부의 상징이었다.

바나나 수입 역시 정부의 중요 과제였다. 1971년 12월 8일 동독은 내각결의를 통해 매년 약 3만~3만5천t의 바나나를 수입하기로 했는데, 인구당 연 1.5~1.6㎏가 배분될 양이었다. 1965년 서독의 경우 연 10㎏였다. 주민들이 반발하자 당국은 1972년 9만1천t의 수입을 공표했다. 호네커는 모잠비크에 25만t 규모의 바나나농장을 건설하여 바나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잠비크를 찾아 정상회담까지 했다. 모잠비크 내전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입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선박에서 하역된 바나나를 실어 나를 열차와 수송차가 문제였다. 적정온도를 갖춘 차량이 태부족했기 때문이다.

귀한 몸 바나나는 부족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물물거래에서 최고의 인기였다. 동독 국민차라는 ‘트라비(Trabant)’는 생산량이 적어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고장 나면 부품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바나나 뇌물은 차량과 부품 기다리는 시간을 크게 당겨 주었다.

동베를린에 위치한 ‘인민의회당(Haus des Volkes)’은 통상 ‘공화국궁전(Palast der Republik)’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동독 주민은 이를 바나나의 ‘B’를 붙여 ‘Balast der Republik’으로 불렀다. 바나나와 각종 커피는 물론이고 다양한 열대과일, 전 세계의 희귀 음식이 풍부하게 차려졌던 그곳을 비아냥댄 것이다. 바나나는 동독 ‘결핍경제(Mangelwirtschaft)’의, 그리고 동독 주민 ‘소비욕구(Konsumhunger)’의 상징이었다.

<사진> 동독 현실을 빗대 동독 국기 중앙의 국장(國章)을 바나나가 대체했다. / dpa

바나나 역시 서독 친인척으로부터 동독 주민이 기대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감귤류과실(Zitrusfrucht)에 대한 동독 주민의 욕구는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결코 해소되지 못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서독은 방문한 동독인에게 ‘환영용돈(Begrüßungsgeld)’으로 30DM를 주었고, 동독인은 이것으로 바나나와 열대과일을 사려고 행렬을 이루었다.

<사진> 라이프찌히에서 봄과 가을에 열린 박람회는 동독이 경제를 세계에 소개하는 창구였다. 봄박람회를 찾은 동독인들이 즐겨 찾은 바나나, 유리 너머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장벽이 무너지기 전 1988년 사회주의 제1의 경제강국 동독의 현실이었다. / Mahmoud Dabdoub

<사진> 장벽이 무너진 직후 서독 카셀시청 앞 바나나트럭에 운집한 동독 주민 / Stadtarchiv/nh

이념과 세뇌교육으로 인간의 기본욕구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동독은 없는 살림에서도 이를 만족시켜주고자 국가적으로 노력했다. 당 창건 기념일이나 국경일에 주민들에게 바나나와 열대과일 배급은 큰 인기를 끌었다. 서독과 교류를 통해 획득한 DM의 일부를 주민용 열대과일 구입에 사용한 것으로 통일 이후 확인되었다.

동독 주민의 요구는 기본욕구 만족, 그 이상이 아니었다. 정치적 요구에 의해 제한되었던 식문화가 정치적 변화를 통해 기본으로 나아가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동독 주민이 찾은 자유에는 먹을 자유도 큰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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