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평화협력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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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42] "바이에른 통일휴게소" (매경프리미엄,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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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41회 작성일 22-04-2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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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42] "바이에른 통일휴게소" (매경프리미엄, 2022.04.18)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4/31797/

독일 통일은 치열한 외교 전쟁의 결과물이다. 전승 4국인 미국·소련·영국·프랑스와 동서독 6국은 수많은 변수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거나 최소한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최대 공감대가 독일 통일을 승인한 '2+4 협정'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협정에 이르는 과정인 '2+4 협상'이 6개국이 아니라 사실상 5개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독과 서독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고, 서독이 동독을 지휘(Dirigieren)하였다.

울리히 알브레히트(Ulrich Albrecht) 교수는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나 1950년대 중반 서독으로 이주했다. 1972년부터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한 그는 세계적 평화연구자로 이름을 떨쳤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민족 통일에 대한 관심도 놓치지 않아 분단 기간 교회를 주 통로로 하여 평화와 환경 문제를 주제로 동독과 접촉·교류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인연과 능력으로 인해 그는 독일 민족의 통일을 결정지은 1990년 3월 18일 동독체제의 마지막 총선으로 구성된 동독 마지막 정부의 외무장관 마르쿠스 메켈(Markus Meckel, 원래 목사)의 기획실장으로 선임되어 '2+4 협상'에 깊숙이 참여하였다. 서독 교수가 동독 외무부의 핵심으로 전승 4국을 상대하면서 평화적 통일을 관철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알브레히트 교수는 통일 직후인 1992년 당시의 체험을 "동독의 청산. '2+4 협상'. 내부자 보고(Die Abwicklung der DDR. Die '2+4-Verhandlungen'. Ein Insider-Bericht)"로 출간하였다. 한반도 통일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필자의 부지도교수('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2: 정치경제학에서 정치생태학으로' 참조)였던 그분을 통해 '통일의 국제정치'를 생생하게 배울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 1998년 알브레흐트 교수와 함께 한 필자 / 사진=손기웅

폐허의 1945년 베를린을 떠오르게 하는 우크라이나 참상이 언제 끝날지 짐작할 수 없다. 근저에 놓인 미국, 러시아, 중국의 패권 각축, 21세기에 다시 발톱을 들이민 20세기 국제정치로 짓눌리는 가슴으로 아홉 번째 통일휴게소를 들린다.


9. 독일 통일의 국제정치

통일독일 NATO 가입의 이면(裏面)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유럽 확장, 예전 소련이나 지금 러시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안보적 우려다. 소련이 독일 통일을 승인한 이유는 독일이 통일되더라도 동독에 NATO 군을 주둔하거나 대량살상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는 서독과 NATO의 약속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동독 지역에 더하여 당시에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었던 폴란드라는 2차적 '완충지대(buffer zone)'의 존재가 독일 통일 허용에 의한 부담을 덜어주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우려가 러시아에 현실이 되었다.

탈냉전 시기 동부 유럽에서 변화의 폭풍이 몰아쳤고, 소련의 형제국을 포함하여 차례로 NATO 회원국이 되었다. 폴란드·헝가리·체코가 1999년, 슬로바키아·루마니아·불가리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슬로베니아가 2004년,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가 2009년, 몬테네그로가 2017년, 북마케도니아가 2020년 NATO에 가담하였다. NATO의 동진(東進)은 러시아의 안보를 압박하였으나 그것을 막거나 대응할 능력, 힘이 러시아에 없었다.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합의한 각자의 세력권을 존중하자, 세력권 확장을 위한 주변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줄이자, 필요 부분에서 상호 협력하자는 데탕트(détente) 즉 긴장 완화의 평화 공존에 합의했다. 힘을 비축한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전 세계는 신냉전에 돌입했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에 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동안 힘을 키운 자신의 영도로 건설한 새로운 러시아제국을 보여주려는 푸틴의 반격이다.

러시아 안보전문가 중에는 동독을 놓아버린 것이, 통일독일의 NATO 가입을 허용한 것이 안보에 구멍을 낸 패착이었다고 당시 국가수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비난한다. 고르바초프는 왜 통일독일의 NATO 가입을 추인한 것일까? 그 의도와 다른 전승국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독일을 둘러싼 모든 국가는 NATO나 WTO(바르샤바조약기구, 1991년 해체)와 조약상의 의무로 그 군사력의 규모나 배치에 있어서 상호 간에 규제를 받고 있다. 통일독일이 NATO를 벗어나면 그들이 군사력에 관해 주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독일이 조약상의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의 규모나 배치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데 반해, 그 주변 국가가 그러지 못할 경우 유럽에는 새로운 불안이 닥쳐올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통일독일을 중립화하여 어떠한 안전보장기구의 굴레도 쓰지 않게 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통일독일이 WTO 가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상황에서 남은 유일한 안전판이 통일독일을 NATO에 묶어두는 것이다. 소련은 물론이고 나머지 전승 연합국, 나아가 유관국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2+4 협정'

'2+4 협상'에 참가하였던 6개국 외무장관은 1990년 9월 12일 '독일에 관한 최종규정에 관한 협정', 이른바 '2+4 협정'에 서명하였다. 동 협정은 전 독일의 완전한 주권 회복과 서방에의 결합, 즉 통일독일의 EC 및 NATO에의 가입을 담보하였다.

통일의 법적·정치적, 외부적 틀이 완비된 것이다. 동 협정은 전승 4국 의회의 비준을 거쳐 1991년 3월 15일 발효되었다. 전승 4국이 보유하였던 독일에 관한 특별권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과 함께 소멸되었다.


▲ 서독 외교력의 ‘별의 순간(Sternstunde)’, 모스크바에서 열린 「2+4 협정」 서명식 / 사진=J. H. Darchinger

'2+4 협정' 가운데 주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된 독일은 서독, 동독 및 베를린을 포괄한다.

둘째, 현존하는 국경선은 최종적인 것이다. 독일은 타국에 대하여 영토 요구를 절대로 제기하지 않는다. 오데르-나이쉐(Oder-Neiße) 국경을 독일-폴란드 간 협정을 통해 확인한다.

셋째, 독일은 평화와 ABC(원자·생물·화학)무기의 포기에 관한 자국의 확인을 더욱 확고히 한다.

넷째, 독일군의 병력 규모는 37만명으로 제한한다.

다섯째, 1994년까지 소련군은 동독과 동베를린으로부터 철수한다.

여섯째, 그 후 NATO에 속하는 독일군을 제외한 어떠한 외국 군대, 어떠한 핵무기 및 핵무기 운반수단도 동독 지역에 주둔하지 않는다.

일곱째, 베를린과 독일 전역에 관한 전승 4국의 권한과 책임은 종식된다.

여덟째, 통일된 독일은 완전한 주권을 가진다.

 
▲ 「2+4 협정」 / 사진=독일 외무성

통일은 서독 외교력의 눈부신 성과다. 여기에 당시 'Made in Germany'로 상징된 서독 경제력이 든든한 뒷받침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2+4 협정' 서명 이튿날 AP는 다음의 기사를 타진했다.

"불과 7개월 전에 정치-수학자들은 '독일과 전승국 간의 협상이 2+4 대화이냐 혹은 오히려 4+2 대화인가?', '누가 가장 먼저 발언권을 가지며, 누가 결정권을 가지는가?'에 관해 논란을 벌였다. 1+나머지 국가 간의 대화, 그것이 독일의 주권을 재정립하기 위한 협상이었다. 그러나 본(서독의 수도 Bonn)이 최종적인 조건들을 주도하였다. 모스크바는 자신의 제안을 번번이 철회해야만 했다. 최종적인 '합의'는 최초 서독의 입장이었다. 전체 독일의 NATO 가입. 그 외 어떤 것도 고려될 수 없었다. 협상의 진행을 통해 구 세계에 새로운 권력구조가 반영되었다. 독일이 주도하였다. 군사력을 통해서가 아니다. 오늘날 더 이상 은밀하지 않은 매혹적인 DM(서독 마르크화)이 이끌어낸 것이다. 모스크바에서는 물론 바르샤바에서도 사람들은 느낀다: 유럽으로의 길은 베를린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독일통일과 유럽통합

독일의 통일, 그것은 어떠한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관련된 모든 국가에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리고 통일독일은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특히 유럽통합으로 다가서야 함을 독일의 정치권은 잘 인식하였다.

헬무트 콜 수상은 통일 이튿날인 1990년 10월 4일 베를린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통일을 승인한 미·영·프·소 전승 4국에 사의를 표하는 한편 유럽통합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독일 외교정책의 방향을 밝혔다. 그는 통일독일은 20세기 독일인이 자행한 범죄행위, 특히 유대인 학살행위를 결코 잊지 않음으로써 독일 역사의 어두운 면을 길이 기억하고, 이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과 독일이 국력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외교정책 기조를 천명하였다.

첫째, 독일은 인근 국가들과 우호·선린정책을 추구하며, 독자적·민족주의적 정책을 버리고 통합된 유럽의 일원으로서 세계 평화를 추구한다.

둘째, 서구 제국, 미국, 캐나다 등과의 동맹 및 유대관계를 존중하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한다.

셋째, 독·프 간 우호협력을 통해 유럽의 통합 및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수행한다.

넷째, CSCE(유럽안보협력회의, 1995년부터 유럽안보협력기구: OSCE)가 유럽통합에 기본적으로 기여했음을 인정하고, 동 기구의 상설기구화 등 발전을 추진한다.

다섯째, NATO와 WTO 간에 우호·동반자 관계 설정을 모색한다.

여섯째, 범유럽적 책임이란 차원에서 독·소 우호협력 관계를 중시한다.

일곱째, 폴란드와 항구적인 화해를 추구하고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을 지원한다.

'2+4 협상'의 서독 실무 주역이었던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상도 통일 이후 독일의 부상에 대한 관련국의 우려를 깊이 유념하였다. 10월 26일 "유럽에서의 새로운 시작(Ein neuer Anfang in Europa)"이란 연설로 통일 독일의 외교정책 기조를 밝혔다.

"이 협정에 담겨진 우리의 천명과 의무들은 유럽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우리의 기여이다. … 독일의 국가적 통일은 완결되었다. 전 유럽의 통일 역시 완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개혁정책의 성공을 위한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고 있다."


▲ 통일 직후 1990년 11월 함께한 콜 수상, 겐서 외무상, 고르바초프 서기장 / 사진=Reuters

한반도와 독일 간에 존재하는 역사적, 상황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통일 역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의 국제정치적 씨름의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가능케 할 든든한 바탕은 남북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할 대북정책, 북한 주민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란 희망을 심어주는 정책을 끊임없이 펼쳐야 한다. 동시에 북한 주민의 결단을 촉진하고, 주변 4강을 통일로 견인할 수 있는 든든한 경제력, 'Made in Korea'가 대한민국 상징이 되도록 힘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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