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46]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동해 퀼룽스보른" (매일경제 프리미엄, 20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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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02회 작성일 22-05-16 12:06본문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46]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동해 퀼룽스보른" (매일경제 프리미엄, 2022.05.16)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5/31920/
동서독 접경선 1393㎞ 종주의 종착지, 동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 간 3각 접경선으로 향하는 길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종주의 출발을 독일 북쪽 동해(Ostsee)를 동서로 가른 분단 해안에서 시작하지 못한 탓이다. 바닷가에서 출발해 깊숙한 내륙에서 마치는, 분단 전(全) 길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었다.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12'에서 소개한 쉬루툽(Schlutup) 지척이 동해이기는 하지만, 해양 분단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고 기록하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결국 뜻을 이루었고, 방향을 틀어 북쪽 끝 퀼룽스보른(Kühlungsborn)으로 향한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장벽 구축을 시작으로 동독은 전 접경선에 방벽을 세웠다. 해안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63년부터 서독을 마주 보는 동해 해안을 따라 콘크리트감시탑을 세웠다. 높이 11m, 직경 1.4m 기둥 위에 높이 2.74m의 8각 감시실을 만들었다. 11m 높이를 들어 이 형의 탑을 'BT-11', 즉 '감시탑 11(Beobachtungsturm 11)'로 불렀다.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23: 유럽 들판 뵈크비츠-치헤리 접경박물관"에서 높이 9m의 BT-9를 소개한 바 있다.
3~4명이 근무하는 감시실에는 감시 및 통신장비와 화기가 장착되었다. 지붕에 작은 문이 있어 올라가면 지붕 위에 서치라이트가 있다. BT-11 감시탑을 동독은 동해 연안에 총 27개 세웠다.
통일 이후 분단의 상처를 잊기 위해 감시탑들은 제거되어 이제 두 개만 남았다. 뤼벡만(Lübecker Bucht)을 사이에 두고 서독을 마주 보는 동독 동해안 마을 퀼룽스보른에 그중 하나가 있고, 박물관으로 상시 개방된 유일한 곳이다. 이곳 BT-11은 1973년에 세워졌다.
퀼룽스보른 동해접경탑박물관
2002년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동독 동해접경감시탑을 역사적 기념물로 보존하려는 협회를 만들었다. 분단의 역사, 당시 지역 주민의 삶과 그들의 숙명을 후대에게 피부에 와닿게 전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자유를 찾고자 동해에 몸을 던진 탈출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기록하였다. 임무의 선두에 선 사람이 동독 당시 지역 시장이었던 크누트 비익(Knut Wiek)이었다.
2013년 7월에야 '퀼룽스보른 동해접경탑박물관(Ostsee Grenzturm Museum Kühlungsborn)'이 문을 열었다. 방문한 날이 휴관일이었음에도 누구보다 당시의 상황을 잘 알았던 비익 전 시장이 문을 활짝 열고, 하나하나 체험에서 나오는 역사를 증언해주었다.
▲ 퀼룽스보른의 지리적 위치로 점선이 경계선이고 좌측이 서독(Bundesrepublik)이고 우측 아래가 동독(DDR)이다(사진 위). 아래 사진은 퀼룽스보른으로부터 서독과 덴마크까지 거리로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들의 험난했던 여정을 보여준다. / 사진=손기웅
▲ 박물관은 중앙의 해양감시탑, 우측의 실내전시실, 좌측의 안내판을 포함한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된다. / 사진=손기웅
▲ 계단을 올라가면 8각의 감시실, 감시실 지붕에 서치라이트가 있다. / 사진=손기웅
자유를 향한 용기들
베를린장벽 건설을 시발로 졸지에 전 접경선이 닫히자 동독 주민에게 세상이 확 좁아졌다. 사회주의 형제 6개국만 그들의 세계가 되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서독 친척과 친지와의 만남은 기약이 없었다.
꽉 막힌 육상보다 그나마 장벽이 없는 동해가 탈출로로 떠올랐다.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혼자 혹은 가족과 함께? 위험이 어느 정도일까? 다른 사람이 알면 끝이다. 어떻게 비밀리에 할 수 있을까?
탈출에 용기는 기본이고 창의력이 필요했다. 탈출을 위한 안내서나 지침서가 있을 리 없는 상황에서 어떤 경로, 어떠한 수단을 택할지 자신이 결정하고 실행해야 했다. 고무침대, 카누, 직접 만든 수영기구 등을 이용하거나 혹은 오로지 자신의 육체에 의존해야 했다. 짧게는 25㎞ 멀게는 40㎞ 이상을 의지 하나로 견뎌야 했다.
공식발표에 의하면 동독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 탈출을 시도한 5609명 가운데 단지 913명만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일견 건너기 쉬울 듯한 동해에는 찬 수온 외에 폭풍, 강한 조류 등 예측 불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에 감행되어야만 하는 탈출에 어둠이 또 다른 난관이었다.
약 180명이 목숨을 잃었다. 탈출에 성공하지 못 한 사람들을 기다린 곳은 차디찬 감방이었다. 최대 4년 반 동안 철창에 갇혔다.
1961~1962년 사이 퀼룽스보른 출신 18명의 청년들이 동해의 물살을 갈랐다. 가장 선호된 수단이 조립식 보트였다. 성능이 괜찮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운반과 이용이 간단했다. 탈출이 빈번하자 당연히 경비가 강화되었고, 탈출을 위해서는 더욱 풍부한 착상과 많은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역사 / 사진=손기웅
① 자유를 찾지 못한 정신적 자유인, 동독과 서독은 물론이고 덴마크와 스웨덴 백사장에서 발견된 이들의 신원은 거의 확인되지 못했다. 붙잡힐 수 있다는 현실에 신분을 확인할 어떤 것도 휴대하지 않았기에.
② 1962년 어부 루디 베스텐도르프는 보트로 퀼룽스보른을 출발해 덴마크로 방향을 잡았다. 국경경비선의 1차 검문에서 그는 어부로 위장하여 넘어갈 수 있었으나, 목적지 직전의 2차 검문에서 탈출이 탄로 나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③ 기술자 만프레드 부르마이스터는 1969년 '아쿠아 스쿠터'를 직접 만들어 6시간을 헤엄치다 다행히 덴마크 소방선에 의해 구조되었고, 이후 서독으로 올 수 있었다.
④ 한 선박공이 동독 세관선을 훔쳐 가족과 함께 36시간을 달려 1971년 10월 25일 덴마크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⑤ 1972년 7월 26일 페터 되블러는 잠수복, 잠수경, 수중 나침판만으로 25시간을 헤엄쳐 48㎞ 떨어진 서독 페마른(Fehmarn)에 도착했다. 수영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례 가운데 가장 길었던 거리로 그는 이를 위해 2년 동안 체력을 다졌다.
⑥ 기술자 발터 게르버는 1980년 자신이 만든 잠수정으로 수차례 서독행 탈출을 시도했다. 마지막 시도에서 방향키가 말을 듣지 않자 잠수정을 침몰시킬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 동독군 잠수부에 의해 잠수정이 발견되어 4년간 투옥되었다.
⑦ 볼프강 트로비쉬와 마티아스 코흐는 둘 다 19세였다. 가방에 고무보트를 담아 열차를 수 시간 타고 퀼룽스보른에 도착했다. 해안에서 보트를 펼치고 출발하려는 찰나 불심검문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각각 20개월, 24개월 투옥을 언도받았다.
⑧ 1987년 11월 14일 두 명의 청년이 고무침대보트에 몸을 실었다. 9시간에 걸쳐 사투를 벌였으나 동독 해양경비선에 붙잡혀 동독군에 인계되었다.
⑨ 자동차 정비공 올라프 K는 1989년 6월 26일 자동차 바퀴에 모터를 달아 덴마크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장벽이 무너졌다.
▲ 1988년 코스트바데 가족 네 명이 동해를 넘어 탈출에 성공한 고무보트 실물 / 사진=손기웅
베른트 베트거는 천재였다. 모터자전거의 모터를 이용하여 앞쪽에 프로펠러, 위쪽에 연료탱크와 가스배출관을 만들고, 자신은 스노클링을 쓰고 잠수 반 수영 반 탈출했다. 자신이 만든 '아쿠아 스쿠터'를 특허 등록하고 개량품을 시리즈로 제작하였다.
▲ 베른트 베트거의 아쿠아 스쿠터 / 사진=손기웅
야외전시장에는 1962~1988년간 이 지역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의 주소, 생사 여부, 탈출 방법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대부분은 익사하거나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이름 옆의 십자가 표시, 마지막 숨을 쉴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보았을까, 명복을 빈다. 1972년과 1988년에 성공한 페터 되블러와 코스트바데의 이름이 보인다.
▲ 생과 사로 나뉘었지만 모두 자유인이었다. / 사진=손기웅
서독의 언론은 탈출자, 특히 성공한 탈출자들의 사연을 상세히 소개하고, 자유를 향한 그들의 용기와 의지를 집중 조명했다. 한편 동독은 그들이 서독에 의해 유인·납치당했다고, 서독군이 해양국경선을 침범하고 테러를 감행했다고 주장하고 선전물을 주민들에게 배포했다.
▲ 서독 신문의 탈출자 소개(사진 위)와 동독의 비난 선전물(사진 아래) / 사진=손기웅
▲ 해안을 순찰 중인 동독군과 당시 사용했던 감시망원경, 이젠 관광용이다. / 사진=Ostsee Grenzturm Museum·손기웅
▲ 공산독재 시절 시장, 자유민주사회 역사박물관 창립자, 비익 전 시장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내내 떠오른 뜨거움, 자유! 공기처럼, 없어야 깨닫는 그 소중함. 인민민주주의체제에서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만이 아니었다. 그 체제에 눈 떴을 뿐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결단하고 몸을 일으킨 용기, 동독 독재체제의 멸망과 통일의 길을 연 동력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자유를 수십 번 외쳤다. 그 자유를 내실화하고, 북한 주민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실천만이 남았다.
동해에 몸을 던지고 장벽을 기어오른, 조국의 광복과 통일에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들이 준엄하게 꾸짖는다,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5/31920/
동서독 접경선 1393㎞ 종주의 종착지, 동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 간 3각 접경선으로 향하는 길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종주의 출발을 독일 북쪽 동해(Ostsee)를 동서로 가른 분단 해안에서 시작하지 못한 탓이다. 바닷가에서 출발해 깊숙한 내륙에서 마치는, 분단 전(全) 길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었다.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12'에서 소개한 쉬루툽(Schlutup) 지척이 동해이기는 하지만, 해양 분단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고 기록하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결국 뜻을 이루었고, 방향을 틀어 북쪽 끝 퀼룽스보른(Kühlungsborn)으로 향한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장벽 구축을 시작으로 동독은 전 접경선에 방벽을 세웠다. 해안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63년부터 서독을 마주 보는 동해 해안을 따라 콘크리트감시탑을 세웠다. 높이 11m, 직경 1.4m 기둥 위에 높이 2.74m의 8각 감시실을 만들었다. 11m 높이를 들어 이 형의 탑을 'BT-11', 즉 '감시탑 11(Beobachtungsturm 11)'로 불렀다.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23: 유럽 들판 뵈크비츠-치헤리 접경박물관"에서 높이 9m의 BT-9를 소개한 바 있다.
3~4명이 근무하는 감시실에는 감시 및 통신장비와 화기가 장착되었다. 지붕에 작은 문이 있어 올라가면 지붕 위에 서치라이트가 있다. BT-11 감시탑을 동독은 동해 연안에 총 27개 세웠다.
통일 이후 분단의 상처를 잊기 위해 감시탑들은 제거되어 이제 두 개만 남았다. 뤼벡만(Lübecker Bucht)을 사이에 두고 서독을 마주 보는 동독 동해안 마을 퀼룽스보른에 그중 하나가 있고, 박물관으로 상시 개방된 유일한 곳이다. 이곳 BT-11은 1973년에 세워졌다.
퀼룽스보른 동해접경탑박물관
2002년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동독 동해접경감시탑을 역사적 기념물로 보존하려는 협회를 만들었다. 분단의 역사, 당시 지역 주민의 삶과 그들의 숙명을 후대에게 피부에 와닿게 전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자유를 찾고자 동해에 몸을 던진 탈출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기록하였다. 임무의 선두에 선 사람이 동독 당시 지역 시장이었던 크누트 비익(Knut Wiek)이었다.
2013년 7월에야 '퀼룽스보른 동해접경탑박물관(Ostsee Grenzturm Museum Kühlungsborn)'이 문을 열었다. 방문한 날이 휴관일이었음에도 누구보다 당시의 상황을 잘 알았던 비익 전 시장이 문을 활짝 열고, 하나하나 체험에서 나오는 역사를 증언해주었다.
▲ 퀼룽스보른의 지리적 위치로 점선이 경계선이고 좌측이 서독(Bundesrepublik)이고 우측 아래가 동독(DDR)이다(사진 위). 아래 사진은 퀼룽스보른으로부터 서독과 덴마크까지 거리로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들의 험난했던 여정을 보여준다. / 사진=손기웅
▲ 박물관은 중앙의 해양감시탑, 우측의 실내전시실, 좌측의 안내판을 포함한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된다. / 사진=손기웅
▲ 계단을 올라가면 8각의 감시실, 감시실 지붕에 서치라이트가 있다. / 사진=손기웅
자유를 향한 용기들
베를린장벽 건설을 시발로 졸지에 전 접경선이 닫히자 동독 주민에게 세상이 확 좁아졌다. 사회주의 형제 6개국만 그들의 세계가 되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서독 친척과 친지와의 만남은 기약이 없었다.
꽉 막힌 육상보다 그나마 장벽이 없는 동해가 탈출로로 떠올랐다.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혼자 혹은 가족과 함께? 위험이 어느 정도일까? 다른 사람이 알면 끝이다. 어떻게 비밀리에 할 수 있을까?
탈출에 용기는 기본이고 창의력이 필요했다. 탈출을 위한 안내서나 지침서가 있을 리 없는 상황에서 어떤 경로, 어떠한 수단을 택할지 자신이 결정하고 실행해야 했다. 고무침대, 카누, 직접 만든 수영기구 등을 이용하거나 혹은 오로지 자신의 육체에 의존해야 했다. 짧게는 25㎞ 멀게는 40㎞ 이상을 의지 하나로 견뎌야 했다.
공식발표에 의하면 동독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 탈출을 시도한 5609명 가운데 단지 913명만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일견 건너기 쉬울 듯한 동해에는 찬 수온 외에 폭풍, 강한 조류 등 예측 불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에 감행되어야만 하는 탈출에 어둠이 또 다른 난관이었다.
약 180명이 목숨을 잃었다. 탈출에 성공하지 못 한 사람들을 기다린 곳은 차디찬 감방이었다. 최대 4년 반 동안 철창에 갇혔다.
1961~1962년 사이 퀼룽스보른 출신 18명의 청년들이 동해의 물살을 갈랐다. 가장 선호된 수단이 조립식 보트였다. 성능이 괜찮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운반과 이용이 간단했다. 탈출이 빈번하자 당연히 경비가 강화되었고, 탈출을 위해서는 더욱 풍부한 착상과 많은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역사 / 사진=손기웅
① 자유를 찾지 못한 정신적 자유인, 동독과 서독은 물론이고 덴마크와 스웨덴 백사장에서 발견된 이들의 신원은 거의 확인되지 못했다. 붙잡힐 수 있다는 현실에 신분을 확인할 어떤 것도 휴대하지 않았기에.
② 1962년 어부 루디 베스텐도르프는 보트로 퀼룽스보른을 출발해 덴마크로 방향을 잡았다. 국경경비선의 1차 검문에서 그는 어부로 위장하여 넘어갈 수 있었으나, 목적지 직전의 2차 검문에서 탈출이 탄로 나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③ 기술자 만프레드 부르마이스터는 1969년 '아쿠아 스쿠터'를 직접 만들어 6시간을 헤엄치다 다행히 덴마크 소방선에 의해 구조되었고, 이후 서독으로 올 수 있었다.
④ 한 선박공이 동독 세관선을 훔쳐 가족과 함께 36시간을 달려 1971년 10월 25일 덴마크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⑤ 1972년 7월 26일 페터 되블러는 잠수복, 잠수경, 수중 나침판만으로 25시간을 헤엄쳐 48㎞ 떨어진 서독 페마른(Fehmarn)에 도착했다. 수영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례 가운데 가장 길었던 거리로 그는 이를 위해 2년 동안 체력을 다졌다.
⑥ 기술자 발터 게르버는 1980년 자신이 만든 잠수정으로 수차례 서독행 탈출을 시도했다. 마지막 시도에서 방향키가 말을 듣지 않자 잠수정을 침몰시킬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 동독군 잠수부에 의해 잠수정이 발견되어 4년간 투옥되었다.
⑦ 볼프강 트로비쉬와 마티아스 코흐는 둘 다 19세였다. 가방에 고무보트를 담아 열차를 수 시간 타고 퀼룽스보른에 도착했다. 해안에서 보트를 펼치고 출발하려는 찰나 불심검문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각각 20개월, 24개월 투옥을 언도받았다.
⑧ 1987년 11월 14일 두 명의 청년이 고무침대보트에 몸을 실었다. 9시간에 걸쳐 사투를 벌였으나 동독 해양경비선에 붙잡혀 동독군에 인계되었다.
⑨ 자동차 정비공 올라프 K는 1989년 6월 26일 자동차 바퀴에 모터를 달아 덴마크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장벽이 무너졌다.
▲ 1988년 코스트바데 가족 네 명이 동해를 넘어 탈출에 성공한 고무보트 실물 / 사진=손기웅
베른트 베트거는 천재였다. 모터자전거의 모터를 이용하여 앞쪽에 프로펠러, 위쪽에 연료탱크와 가스배출관을 만들고, 자신은 스노클링을 쓰고 잠수 반 수영 반 탈출했다. 자신이 만든 '아쿠아 스쿠터'를 특허 등록하고 개량품을 시리즈로 제작하였다.
▲ 베른트 베트거의 아쿠아 스쿠터 / 사진=손기웅
야외전시장에는 1962~1988년간 이 지역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의 주소, 생사 여부, 탈출 방법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대부분은 익사하거나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이름 옆의 십자가 표시, 마지막 숨을 쉴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보았을까, 명복을 빈다. 1972년과 1988년에 성공한 페터 되블러와 코스트바데의 이름이 보인다.
▲ 생과 사로 나뉘었지만 모두 자유인이었다. / 사진=손기웅
서독의 언론은 탈출자, 특히 성공한 탈출자들의 사연을 상세히 소개하고, 자유를 향한 그들의 용기와 의지를 집중 조명했다. 한편 동독은 그들이 서독에 의해 유인·납치당했다고, 서독군이 해양국경선을 침범하고 테러를 감행했다고 주장하고 선전물을 주민들에게 배포했다.
▲ 서독 신문의 탈출자 소개(사진 위)와 동독의 비난 선전물(사진 아래) / 사진=손기웅
▲ 해안을 순찰 중인 동독군과 당시 사용했던 감시망원경, 이젠 관광용이다. / 사진=Ostsee Grenzturm Museum·손기웅
▲ 공산독재 시절 시장, 자유민주사회 역사박물관 창립자, 비익 전 시장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내내 떠오른 뜨거움, 자유! 공기처럼, 없어야 깨닫는 그 소중함. 인민민주주의체제에서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만이 아니었다. 그 체제에 눈 떴을 뿐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결단하고 몸을 일으킨 용기, 동독 독재체제의 멸망과 통일의 길을 연 동력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자유를 수십 번 외쳤다. 그 자유를 내실화하고, 북한 주민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실천만이 남았다.
동해에 몸을 던지고 장벽을 기어오른, 조국의 광복과 통일에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들이 준엄하게 꾸짖는다,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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