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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문]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형제국' 북한 동태 감시 첩보서" (최보식의 언론,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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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73회 작성일 23-04-1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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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4년 동독을 방문한 김일성을 맞는 호네커

<사진> 동독 국가안보성과 북한 국가보위부 간 협력합의서 초안 / 사진=슈타지 기록 보관소

[손기웅의 통일문]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형제국' 북한 동태 감시 첩보서" (최보식의 언론, 2023.04.17)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10111

미국의 우리 대통령실을 포함한 정부 부처, 정책 결정에 대한 도·감청이 물의를 빚고 있다. 진위를 떠나 구설수에 오른 즉시 윤석열 정부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이다”란 입장표명으로 상황 정리에 나서야 했다.

국가마다 최고·최신의 인적·기술적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첩보전에 나서고 있다는, 나서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구상에 이를 하지 않는 국가가 있을 수 없고, 처벌을 하자면 그대로 반사(反射)될 수 있다.

문제는 비밀리에 비공개로 진행되어야 할 ‘공작’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경우다. 상대에 (비)공개적으로 경고하고 처리를 요구하되, 자국 피해를 최소화하는 ‘적절한 대응’이 요구된다.

그 중심에는 ‘국익 우선’이 놓여야 한다. 등 뒤에 비수를 감추고 다른 손으로 악수하는 ‘정치’가 아니라, 양손으로 비수를 힘껏 내지르고 있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국내 정국이다. 전쟁 중에도 대화가 있듯이, 남북 간에도 합의가 있듯이, 여야는 국익적 차원에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

1990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을 핵심적으로 지탱한 눈과 귀이자 총알이 국가안보성, 속칭 ‘슈타지(Stasi)’였다. 통일 이후 밝혀진 그의 활동은 독재국가가 어떻게 통제·관리·운영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각별한 연구대상이다. 특히 독재체제를 형성하는데 서로 주거니 받거니 도움과 영향을 교류했던 ‘사회주의 형제국’ 북한 관련 슈타지의 유산, 첩보문건들이다.

슈타지 관점에서 본 북한은 이렇다. ‘김일성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군사 및 감시·통제 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미제국주의와 ‘그 남쪽 꼭두각시’에 대한 깊은 증오를 특징으로 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이념적 균형을 맞추고자 흔들거리는 행보로 짜증나게 하는, 그럼에도 동독과 일찍부터 ‘전우애’를 형성한 특이한 사회주의 국가다.

동독 군부와 슈타지의 북한과 첫 번째 접촉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슈타지 전문 용어로 ‘사회주의방위연합’의 틀 내에서 이루어졌다. 1969년 4월 21일, 슈타지 요원 헨케는 평양에서 긴급전보를 타전했다. 북한이 간첩 및 도·감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현대적인 고주파·단파 기술이 부족하다는 내용이었다.

이후로 동·북 간에 수많은 전문가 회의와 교육 과정이 열렸고,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에는 무기·첩보는 물론, 북한이 운용하는 소련 군용기의 유지·관리 기술도 포함되었다. 4~5쌍의 군인 부부가 참여하는 소규모의 ‘휴가 교류’도 조직되었다.

동독과 북한이 1984년 6월 1일 상호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자 그에 근거하여 슈타지와 국가보위부(현 국가보위성) 간 협력은 더욱 활발해졌다. 쌍방의 인적 교류도 강화되어, 동독대표단이 북한 방문 중에 탱크를 생산하는 ‘금성 트랙터공장’의 지하터널 등 비밀무기공장도 방문할 수 있었다.

북한이 무기거래중개자로 역할을 한 것도 기록되었다. 시리아는 동독 소멸 직전인 1989년 9월 26일, 부다페스트 공항을 경유하여 오스트리아 cbs 회사의 협조를 거쳐 북한에 ‘63 Wega 3 로켓’을 1정당 31,000달러로 비밀리에 제공해줄 것을 슈타지의 대외무역 및 외환책 알렉산더 샬크-골로드코프스키에 요청했다. 무기 종착역은 당연히 시리아다.

곧이어 일어난 동독 내 평화혁명으로 북한과의 거래가 매우 어려워졌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11월 29일, 동독 로스토크 항구의 슈타지 지부는 급히 동베를린 본부에 전문을 보냈다, 작금의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북한으로 보내는 특수 운송물(무기, 탄약, 폭발물, 군사기술)은 밀폐된 특수 컨테이너로만 진행해야 한다고.

북한 내 슈타지 요원은 북한의 경제적 곤경을 가감 없이 보고했다. 위장명 루드비히와 이름가르트는 1986년 8월 8일 식품 공급이 ‘매우 위급한 상황’이며, 이로 인해 특히 어린이들 사이에 심각한 영양결핍 증상이 나타나고, 주민들의 인간관계조차 매우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슈타지는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동독에서 자녀들이 공부하게 하려는 열망이 강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학생들은 물론 북한 군간부들도 동독에 유학하게 되었고, 과학기술분야·정보학·독문학은 물론 범죄수사학도 포함되었다.

1983년 3월 슈타지 파일에 따르면, 김일성의 4남이자 둘째 처 김성애의 2남 김영일이 한동안 동베를린에서 특권적인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다. 1982년 중반까지 훔볼트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고, 북한 대사관은 그를 위해 방 4개짜리 아파트를 임대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영일은 공부에 열심이지는 않았고, 주변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친 듯하다, 그에게는 전용 운전기사도 배속되었는데 대사관 정식 직원이 아닌 그가 몬 승용차 CD-11이 사고를 일으켜 벌금이 부과되었다, 귀국 이후 동베를린 북한대사관 참사로 동독으로 돌아왔고, 간경화로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슈타지는 동독에 유학 온 모든 북한 학생들을 상시 감시하였다. 북한대사관도 강도 높게 면밀히 감시하였고, 심지어 대사관 우편물도 가로챘다. 서신들을 복사하여 분석하였고, 그 복사본들이 지금 슈타지 기록 보관소에 남아있다.

동독과 북한의 정상들이 만나고 군대표단이 방문했을 때, 양측은 항상 서로를 최고의 찬사로 칭송했지만, 슈타지는 북한을 불신했다. 북한 대사관원이 서베를린을 거쳐 동방으로 무기와 헬기부품 등 서방 물품을 밀반입하고, 동독에서 한 산업스파이 활동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이 때때로 이를 기사로 다루었고, 동독은 이로 인해 명성을 잃을까 우려했다.

1984년 동독 국가수반 에리히 호네커와 김일성이 동베를린에서 만났고, 두 사회주의 독재자는 ‘완전한 합의’와 ‘흔들리지 않는 우정’을 다짐했다. 2년 뒤 호네커가 평양으로 김일성을 답방했고, 그 3년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첩보 기술을 전수해 준 고마움에서인지 김일성은 그에게 망명처를 제안했다. 1912년생으로 김일성과 동갑인 호네커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1994년 5월 29일에, 얼마 후인 7월 8일에는 김일성이 각각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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